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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하는 힘 - 아즈마 히로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146

by 최영훈
“정정하는 힘이란 과거와의 일관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과거의 해석을 바꾸어 현실에 맞게 고쳐가는 힘을 말한다. 이는 지속하는 힘이고 듣는 힘이며, 나이 듦의 힘이고 기억하는 힘이자 재독해하는 힘이기도 하다.”, P.71


배트맨과 조커

일요일, 처남이 놀러 와 점심을 같이 먹는 와중, 마블 유니버스 얘기가 나왔다. 요즘 한창 이 서사와 세계관에 심취해 있는 딸을 위해 디즈니 플러스를 결제해 줬다는 아내의 말에 마블이 화제의 중심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는 DC 유니버스로 이어졌고 두 세계관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레 나왔다.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생각을 한 후, 난 DC 쪽이라고 얘기했다. 배트맨과 조커, 최근의 우울한 슈퍼맨을 떠올려 보니 내겐 그쪽이 더 맞았다. 그러다 딸이 질문했다.


“아빠는 배트맨이 프로타고니스트라고 생각해, 안타고니스트라고 생각해?”


들었던 단어인데 언뜻 생각이 안 나 딸에게 그 뜻을 먼저 물었다. 딸이 간략히 설명했다. 전자는 긍정적면서 관객이 몰입하는 주인공이자 선한 인물, 후자는 그에 반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 관객의 윤리적 기준에도 도전하는 안티 테제적, 반동적 인물이다. 알다시피 조커라는 인물이 있는 이상 배트맨은 전자인데, 딸의 질문엔 더 심오한 의도가 있었다. 배트맨의 탄생 과정과 영화 시리즈의 단절과 변화를 고려하면 분명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딸은 알고 있는 듯 했다.


대답을 했다. 난 첫 번째 배트맨 영화가 나왔을 때, 여러 번 반복해서 봤고 그 이후에도 봤다. 내 생각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나온 배트맨과 그 전의 배트맨은 분명 다르다. 그전에도 물론 배트맨은 반사회적 리더, 우울한 예언자/선지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다크 나이트 이후부터는 그 이미지가 더 선명해졌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배트맨과 조커는 우리 안에 공존하는 양면성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삶은 그 양자택일의 좁고 날카로운 능선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고.


“사회 상황은 계속해서 바뀐다. 여론도 극히 무책임하다. 어떤 때는 정의로 여겨지던 것이 몇 년 후에는 판단이 뒤집히는 일도 부지기수다. 변화를 모두 예상해 시기가 각기 다른 발언들 사이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논객은 그런 변화에 대처해 계속해서 정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궤도를 수정하면 지지자를 잃고 만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입장을 고수하려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P.132


그들의 이유

앞서 썼듯이 <정정하는 힘>은 <정정 가능성의 철학>의 응용 편이자 실전 편이며 축약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야전과 영원>의 그런 종류의 책인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이론의 전개보다는 정정의 필요성과 적용, 실천이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 그 필요성, 적용, 실천의 분야 또한 개인에서 사회까지 광범위하다. 번역가는 저자가 일본 사회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가서 공감이 안 가거나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는데, 내 생각엔 그건 그야말로 걱정에 불과했다. 우리나 그들이나 처한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표현의 양상이 좀 다를 뿐.


지난겨울부터 올여름까지 이어진 일련의 정치 상황들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등장한 극우의 득세와 백석 넘게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제1 야당이 극우를 표방하는 한 역사 강사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서, 4050 남성과 상반되는 2030 “청년”들의 정치적 성향과 그 성향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각종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이 대립 - 지역, 성별, 세대, “종교” - 이 심화되기만 할 뿐 타협되지는 않는지, 몇몇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정치 평론가들은 왜 현재도 자신의 오류와 오판을, 정규재 씨와 조갑제 씨처럼 “정정”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져왔다.


사실 이 의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 위에 쌓였다. 올 초, 난 현재 대통령에 대해 어느 쪽-지지자, 반대자-도 동의하기 힘든 나만의 감상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어린 시절에 버금가는 가난을 겪어본 필자만의 생각이었다. 그 글엔 SNS를 한 지난 6,7년 동안 쓴 글 중 가장 많은 댓글이 달렸다. 난 그 댓글을 읽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한가하구나, 이게 처음 든 생각이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다들 이렇게 득달 같이.......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렇게 열심히 말하는 이유는 뭐지, 하는 생각이다. 세 번째 든 생각은, 과연 이들은 마주해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잘할까, 자기 의견을 잘 떠드는 만큼 듣기도 잘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는, 이들은 후에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게 입증되면, 아니 그런 “느낌”이 들면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철회하거나 정정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사, 이론, 실존

책 중후반부, 저자는 철학은, 더 나아가 그 철학으로 말하고 살기 위해서는 시사, 이론, 실존, 이 세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예로 들은 마르크스주의에는 이론이 확실했고 당시 정치/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처방전 역할도 했으며, 읽는 이에게 혁명과 운동가로 살아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은 드물다고 지적한다.


학교에 숨어 있는 강단의 철학자들은 학교와 학생의 눈치를 보면서 이론과 시사만 말한다. 한 편, 우리가 흔히 접하는 TV 토론 프로그램이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소위 평론가들은 계속 그 “편”의 사람으로, “대표 스피커”로 부름을 받기 위해 시사와 실존만 있다. 마지막 세 번째의 경우, 그러니까 이론과 실존의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런 이는 삶의 태도가 곧 학문의 자세와 이유이고, 학문의 경지가 곧 그 사람의 인생의 경지인 사람으로, 저자는 그 전형으로 가라타니 고진을 들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영희 선생님도 그런 인물 아닐까.


이런 범주화의 틀로 보면 이 시국에도 극우를 옹호하고 미국이 항공모함을 띄워 가짜 대통령을 몰아낸 뒤 다시 “윤 어게인”의 시대를 복원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일부 정치 평론가들, 소위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의 말이 이해가 간다. 시사에 존재의 존폐 여부, 생존과 생계 여부가 달린 사람들은 돈을 위해, 연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정이 곧 변절로 이해되고, 변절은 곧 후원자와의 절연을 의미한다면, 궁색하고 옹색한 말들의 연쇄는 충분히 이해될만하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아무런 이득도, 이권도 없이 시사(정치)의 문제를 실존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설명할 타당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그저 “정정”, 그 자체가 실존의 사라짐을 의미하기에 그렇게 눈을 감고 투표를 하고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이 그렇게 극우의 논리에 빠져들어 살고 있다고 밖에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나이 듦의 힘, 기억의 힘

앞선 글에도, 또 인용한 글에도 있듯이 정정은 나이 듦의 힘이다. 당연하다. 나이가 들었는데 여전히 젊었을 때의 철학, 그 자체를 고수하고 산다면, 좋게 말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이 안 든 것이다. 그나마 중립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연인이다.”에서나 볼 법한 사람라고 봐도 되겠다. 저자가 말했듯, 필자처럼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정정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한 직장을 수십 년 이상 다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방법과 기술로, 하나의 조직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나의 가능성, 가능한 “다른 나”를 망각하고 살아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정의 힘은 곧 기억의 힘인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소행(溯行)하여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나 자신을 지금, 현재로 소환(召還)하는 것이다. 그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업그레이드다.


다시 만난 과거의 나

강제된 변화의 기로에서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를 동시에 보고 있다. 얼마 전 <대학강사경력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 안엔 2004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십여 년 간 두 대학에서 강의한 과목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 과목은 카피라이팅이었고 그 외에도 홍보영상시나리오 작법, 매체론, 마케팅커뮤니케이션 같은 과목이 있었다. 그렇게 소위 박근혜 정부의 강사법 이후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강단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참 잘 가르쳤었다. 열정적이었다. 덕분에 제법 괜찮은 30대를 보냈다. 그 이후, 딸을 키우면서 세월이 지나갔다. 그동안 조용히 카피라이터로 살았다. 그러다 올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다른 나도 있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이 치고는 괜찮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수영과, 요즘 가끔 하는, 동물의 동작을 흉내 낸 상대적으로 정적인 운동인 “애니멀 플로우” 덕분이다. 몸을 보면서, 난 이 몸의 장점을 대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점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그 방법을 여전히 모르지만, 어차피 죽으면 썩어질 몸, 그전에 늙으면 처지고 무너질 몸, 볼만할 때 쓸 만한 방법을 찾아보자,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방법을 찾아보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카피라이터라는 시간 속에 잠시 뒤로 밀려났던, 기억 속의 내가 걸어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시기에 내 동년배 학자인 아즈마 히로키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또 다른 가능한 나를 과거에 묻어두고 온 이에게 권하고 싶다. 정정이 된 내가 언제 세상에 나가게 될지, 아직 모르지만, 그 막연함 때문에 그 도래의 가능성을 미루기엔 인생이 참 짧다.


사족

불쑥 생각이 난 건데, 과거의 나는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했었다. 이제 사람도 좀 만나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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