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권력과 공간 - 미셸 푸코

동해선에서 읽은 책 135

by 최영훈

이전에도 썼듯이, 독서의 범주는 크게 두 개다. 하나는 관심 있는 분야, 다른 하나는 우발적 선택. 푸코의 이 책은 두 범주가 겹쳤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지난 몇 년간 대통령의 집무실을 여기로 하니, 저기로 하니 하면서 옥신각신했었다. 대선이 코앞인 요즘에도 이 이슈는 공약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말이다. 또 다른 뉴스 하나는 사저에서 물 사용량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다 고가의 캣타워 얘기까지 나오면서 권력자의 공간, 권력과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고 그 생각에 잠겼을 때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여 읽게 됐다.


푸코로 향하는 약도(略圖)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책은 푸코의 권력 이론의 전반을 시대의 흐름과 논의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있어, 제법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규율권력에서 생명권력, 다시 통치성으로 이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주저(主著)-<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가 아닌, 그렇다고 인터뷰와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록들인 <헤테로토피아>와 <안전, 영토, 인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도 아닌 그 외의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책에 담긴 텍스트들은 역자가 직접 선택하고 번역했는데, 1부의 첫 번째 텍스트 <권력의 그물코>는 197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강연, 두 번째 텍스트 <권력과 전략>은 1977년 자크 랑시에르와 가진 서면 인터뷰, 세 번째 텍스트 <권력에 관한 해명 - 몇 가지 비판에 대한 답변>은 1978년 공산주의 철학자 마시모 카치아리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2부의 첫 번째 텍스트 <에티카 감옥에 관하여>는 뉴욕의 이 감옥을 본 후 이뤄진 뉴욕대 교수였던 존 사이먼과의 인터뷰이고, 두 번째 텍스트인 <지리학에 관해 푸코에게 보내는 질문>은 관련 학술지인 <헤로도토스>에 실린 지리학자들과의 인터뷰이며, 이어진 텍스트 또한 이 학술지에 실린 푸코의 기고문이다. 네 번째 텍스트 <권력의 눈>은 역사학자 미셸 페로, 언론인 장 피에르 바루와의 대담이다. 마지막 텍스트는 <18세기 건강정치>로 <치료 기계-근대 병원의 기원>의 서문이다.


권력론의 변화

어떤 책에서든, 그것이 푸코에 관한 책이든 푸코의 저술을 번역한 책이든, 푸코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권력이 그 시대의 주체에게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확인하게 된다. 정신병원과 감옥의 메커니즘으로 알 수 있는 배제와 구분의 권력, 수도원과 학교와 군대에 작용한 규율 권력의 효율성, 이어서 공장과 공장 노동자 숙소와 노동자들을 위해 지어진 마을의 구성으로 알 수 있는 규율 권력과 생명 권력의 협업, 현재적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는 통치와 통치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체가 스스로에 그 미시적 통치를 가하는 자기 관리의 모순까지.


판옵티콘에 관한 대화에서 말했듯이, 그는 권력의 대표적 은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권력이다.”라고 범인을 지목하듯이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와 같은 그의 주저를 읽어가면서 그런 정의를, 하나의 상징이나 표상을 확언받을 수 없다. 권력은 그것이 생긴 이래로 계속하여 그 통치술을 변형시켜 왔으며 다른 옷을 입어 왔다. 그 기술과 외피는 법과 조직으로, 군대로, 학교로 드러났고 심지어 종교와 예술과 문화와 풍습에도, 더 나아가 가정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푸코는 끊임없이 변장하고 신분을 바꿔가며 범행을 저지르는 - 마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처럼 - 사기꾼을 쫓는 탐정처럼 권력의 역사적 궤적을 쫓아가며 그 수행의 행태를, 메커니즘을, 미시적 기구와 도구와 기계와 장치들을, 그것의 작동 방식을, 그것이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와 기업과 노동 현장과 학교와 군대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방식을 폭로한다. 우리는 그 폭로 앞에서 의외로 놀라지 않는데, 그 제시한 것들이 너무 흔하고 그 방식이 너무나 일상적이기에 그것이 권력의 한 형태인지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푸코의 폭로 방식 자체가 너무나 집요하기에 우리가 그 폭로의 궤적을 따라가다 종종 지루해하고 지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이 일, 이 집요한 추적을 계속해 왔고 그 추적은 그의 사후 다른 이들이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그가 밝혀낸 권력의 수행 형태는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말한 자기 착취나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한 끝없는 자기 관리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푸코가 말년에 말한 통치성의 주체 스스로의 적용의 최신 버전을 한병철 같은 학자가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갈 과제

다시, 이 책을 선택했던 우발적 이유, 대통령 집무실의 위치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권력은 자신을 위한 건축-청와대, 시청, 교회, 교황청-을, 국가의 성장과 운영의 효율성을 위한 국민의 교육과 관리를 건축(학교, 군대, 병원)을, 자본주의와 기업의 성장을 위한 건축(공장, 기숙사, 휴게실)을 사용해왔고, 도시 공간(창원, 울산, 구미, 여수 등지의 계획된 산업 단지와 주거 단지)의 조성을 통해 실내와 실외, 그리고 지리적 공간을 사용해 왔다. 우리는 그 정비되고 구획된 실내외 공간, 지리적 공간에서 살면서 그렇게 정교화 됐다. 학생으로, 군인으로, 노동자로, 한 명의 시민으로.


그러나, 푸코가 이 책 말미에 말하듯이,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 저항 앞에서 권력은 자신을 더 교묘히 위장했고 사람-시민, 국민, 더 나아가 주체-는 곳곳에 잠재되어 있고 스며있는 권력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것은 국가와 권력, 위계가 존재하는 한 멈추지 않는 숨바꼭질이며 술래잡기다. 관건은 끊임없는 추적이며 지치지 않는 폭로이며 포기하지 않는 저항이다. 그것이 주체에게 더 요구되는 요즘이다. 더 정교화해지고 더 은밀해지는 권력의 진화 아닌 진화 앞에서 우리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요즘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