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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걸음을 멈추고-사사키 아타루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0

by 최영훈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우선 전제가 되어야 한다. 힙합을 좋아하는가? 힙합에 대해서 좀 아는가? 힙합의 용어에 대해선? 예를 들어 Nas나 Jay Z는? Run DMC는? 쌈디가 사이먼 도미닉 시절, 그의 초창기 시절의 앨범을 들어 봤는가? 힙합엔 왜 그렇게 Mix tape과 Bootleg 앨범이 많을까? Nujabes를 향한, 혹은 추모하는 tribute 앨범은 왜 그렇게 많을까? Likin Park는 왜 그렇게 앨범의 변주가 많을까? 그들은 록 밴드일까, 힙합 밴드일까? DJ, 샘플링, 라임, 힙합에서 작사의 의미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약간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사사키 아타루의 철학에, 더 나아가 심지어 들뢰즈의 철학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참고로 사사키 아타루는 엄청난 힙합 팬이다. 그의 패션을 봐도 알 수 있지.


뒤에 정리해 놓겠지만, 이 책은 Anarekuta 시리즈의 첫 권이다. 이 시리즈들에 담긴 글들은 대체로 2010년을 전후로 써졌지만 멀게는 박사 논문 제출 이전에 쓴 글들도 있다. 일본에서의 출간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불과 몇 년 동안 엄청난 양의 글을 쏟아냈고 무수히 많은 대담에 불려 나갔다. 이 시기,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이 신진 학자의 박사 논문은 그렇게 일본 사회에서 각광을 받았고 그 뒤에도 여기저기에 이 학자를 불러 의견을 물었을까? 당시, 불과 마흔 언저리였던 젊은 학자에게 뭘 기대했던 것일까?


혹시나 해서 그 시기 있었을법한 사건 몇 개를 검색해 봤다. 그러니까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21세기 들어서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 몇 개를 말이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10년엔 일본 헌정 역사상, 그러니까 전후 최초로 정권 교체가 있었다(물론 금세 말아먹었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2011년 3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을 필두로 한 중동 국가들의 술렁임은 2010년 12월에서 그다음 해까지, 월가 점령 시위는 2011년 가을부터 시작됐다.


혁명의 가능성, 그리고 좌절

슬라보예 지젝이 <멈춰라, 생각하라>를 출간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는 2011년, 10월, 월가의 시위에 직접 가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끝맺었던 그 유명한 연설을 말이다. 이때,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일본에도, 중동에도, 심지어 미국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이후의 세계는 더 보수화 됐다. 재스민 꽃은 시들었고 월가는 여전히 잘 돌아가며 오바마의 이후의 미국은 트럼프를 맞이했다. 2017년에 말이다. 게다가 그는 다시 돌아왔다. 이것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귀환이다.

혁명의 시대는 이제 끝났나, 거대 담론의 시대는 이제 끝난 건가, 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사사키 아타루가 거침없이 비판하는 강단의 학자들은 이론으로 답을 제시하거나, 답에 맞는 이론을 찾아 던지면서 혁명의 어설픈 꿈을, 조직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던 한 여름밤의 꿈같았던 그 순진한 시도들을 꾸짖었다. 그 시기, 일본에선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더 무서웠던 건, 사사키 아타루가 지적했듯이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관련 학계의 학자들의 침묵과 더 나아가 정부의 원전 사고 대책과 수습에 대한 옹호였다. 심지어 이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학자와 교수들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그들이 공부한 이론에 기대어 경거망동하는 일본 국민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사사키 아타루를 비롯해 아즈마 히로키, 지바 마사야 등 당시의 신진 학자들은 이런 학자들의 행태에 진절머리를 냈다. 심지어 아즈마 히로키는 체르노빌 다크투어를 계획하고 실행했을 정도였다.


중요한 건 이론이 아니다.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건, <야전과 영원>을 둘러싼 반응이었다. 학계와 출판계, 소위 식자(識者) 층에선 너무 두껍다, 어렵다, 난해하다 등의 반응이 있었는데 정작 관련 이론이나 지식이 전무 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열광하여 사사키 아타루와 출판사에게 감사와 감동의 편지와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난 이 구절을 읽으면서 들뢰즈의, 앞서 서평을 쓴 <다양체>에 담긴, 인터뷰 내용이 생각났다. 들뢰즈가 <안티오이디푸스>를 출간했을 때 프랑스의 학계와 식자층에서 사사키 아타루가 <야전과 영원>을 출간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 있었는데, 정작 대학의 문턱도 넘어 본 적 없는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며 보낸 편지에 감동을 받았다는 내용이 말이다.


그때도, 2010년대와 비슷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1972년에 출간됐는데, 그전에 전 세계는 68 혁명의 기운 속에 변혁의 희망, 혁명의 불꽃을 데일 듯이 만지고 있었다. 잘만하면 우리의 사회가, 나라가, 세계가 혁명의 화염에 휩쓸릴 것 같았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에는 그 불꽃에 취해있던 세계의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이 나라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중 일본에서는 동경대 전공투와 미시마 유키오의 토론이 벌어졌고 적군파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우리나라에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고, 필리핀에서 마르코스의 독재체제가 확립됐으며 칠레에선 그 유명한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이 들어선다. 프랑스의 대학은 구조조정 당했으며, 불과 십여 년 후엔 영국엔 대처가, 미국엔 레이건이 등장한다. 72년 뮌헨 올림픽에선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테러가 발생했으며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LA 올림픽은 반쪽짜리로 치러졌다.


그렇다. 혁명은 실패했고 이념의 장벽은 높아졌으며 권력은 더 난폭해졌다. 이후 이론은, 학교로 들어가 스스로 고매해졌고 현실과 유리됐다. 프랑수아 퀴세의 <루이비통이 된 푸고>에서 말하는 그 경로대로 말이다. 그러나, 참고로 <천 개의 고원>은 1980년에 출간됐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누구를 향한 희망이었을까?


반복; 본쿠라/주사위 던지기

사사키 아타루는 한 대담에서 본쿠라라는 말을 한다. 이건 일본 도박판에서 유래된 말이다. “노름에서 주사위를 던지는 돗자리에 그림자가 져서 어둡다, 보이지 않는다는”, “노름에 약하다.”는, 근본적으로 미래는 예측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판의 초짜들이, 심지어 도박사들이 도박을 하는 건, 새로운 가능성이, 일말의 가능성이 언젠간 “터지기” 때문이다. 마치 들뢰즈가 말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 속에서도 그 던짐과 새로운 숫자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혁명은, 사사키 아타루와 들뢰즈가 말하듯, 이 어리석어 보이는 사소한 반복에서 잉태된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일상의 혁명이다. 고정된 뭔가를 거부하며 이다음의 변화를 기대하며 열려 있는 삶의 태도, 그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앞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2 ; 약속된 장소에서>의 서평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의 전, 현 신자들로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현 신자들의 인터뷰와 더불어, 바쁜 와중에도 옴진리교가 실행한 사린가스 테러 사건의 재판을 종종 방청했는데, 그곳에서 옴진리교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인터뷰할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첫째, 옴진리교와 함께했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건 재판에서 판사와 검사로부터 옴진리교에 빠지게 된 계기와 교리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을 때 이들이 항상 “일반인들은 설명해도 잘 모르시겠지만...”과 같은 말로 진술의 서두를 열었다는 점이다.


“너희들은 말해도 모르겠지만.......”, 이 말은 너무나 흔하다. 심지어 천만이 넘는다는 기독교인들의 교만은 여기서 출발한다. 아무 데나 불법 주차하고 교회를 간 뒤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내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데, 그 기쁨과 영광을 너희들은 모르니........”하는 사고방식이 작동한다.


현재의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이와 유사하다. 00을 읽어 봤느냐, 00을 모르느냐, 일단 그것부터 읽고 와라, 하는 식으로 상대의 논지에 벽을 친다. PC들의 교만도 같다.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니 타자의 반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아예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겐 자기 생각의 밖의 생각, 그 생각의 변주에 대한 가능성이 없다. 그것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트럼프의 귀환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만이 옳다는 PC들,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받아들인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일부 주들의 정책, 그리고 그 정책들의 거부감을 느끼는 흑인과 라틴계들의 반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을 당황케 했던 건 흑인과 라틴계 표의 이탈이었다. 얼마 전 아내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내의 의문을 풀어줬다.


미국 흑인은 근본적으로 침례교인들이 많다. 침례교는 기독교 교파들 중에서 원리주의에 가장 가깝다. 라틴계는 근본적으로 가톨릭이다. 낙태를 반대하는 그들 말이다. 당연히 해리스와 현 민주당의 정책 기조에 반감이 든다. 게다가 해리스의 이슈는 낙태의 여성 결정권이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이슈는 흑인 침례교도들과 라틴계 가톨릭 신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정치적으론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종교적 신념으로는 트럼프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면서 동덕여대 사태와 전공의 사태를 곁들였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이들, 폭력과 극단적 행동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들, 이들에게선 사사키 아타루가 경계해 마지않는 교주주의와 독선이 엿보인다고 했다. 더 나아가 이들로 인해,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이념적 노선으로 인해 다음 대선에도 민주당의 승리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총선에선 승리해도 대선에선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 천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 6백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 수를 개의치 않는 민주당의 승리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여, 부정을 긍정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독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해줬다. 다른 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이데올로기는 마녀 사냥에 빠졌던 중세의 기독교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 했던 매카시즘과 다를 바 없다고도 말해줬다.


생각의 스노볼

앞서, <언더그라운드 2 ; 약속된 장소에서>의 서평에서 말했듯, 고민과 생각의 답을 제시하는, 만능 상자를 제시하는 이들은 이단이다. 또는 그런 걸 제시하는, 강단에서 밥을 먹고사는 철학자들은 어용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완벽한 이론을 제시하거나 세상에 없던 이론을 창작했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과거의 이론은 그 자체만으로는 오늘의 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의 차용, 변용, 인용, 새로운 해석을 통한 재탄생이 지금 이 순간의 답이 될 수 있다. 딱 이 순간.


힙합 그룹 RHYMESTER의 래퍼인 우타마루는 사사키 아타루와의 대담에서 가사를 어떻게 쓰는지, 곡을 어떻게 만드는지 질문을 받았다. “원래 사유의 과정 자체를 곧잘 창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로에서,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떨떠름하게 창조한다기보다는 방대한 쓰레기에서 탄생합니다. 유무로 말하면 최근에는 주로 무를 선택하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다. 그 쓰레기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 가능성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만 나름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 우타마루가 말했듯,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지 않는지, 그것의 기준이 필요할 뿐이다. 기억하자.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최고인지, 무엇인 절대적인 답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다. 포와로가 범인을 색출하듯, 소거법으로 하나둘씩 아닌 것 같은 것을 제거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평생을 말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Anarekuta 시리즈는 일종의 Mix Tape이자 Bootleg 앨범이다. 오리지널과 진리의 자리를 거부하고 오로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타고 유명해지길 바라는 무명 힙합 그룹의 앨범과 같다. 더 나아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저 세상으로 간 전설적인 음악가의 잊을 수 없는 멜로디를 차용하여 새롭게 세상에 내놓는 힙합 음악과 같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Anarekuta 시리즈는 사사키 아타루라는 지적 힙합 아티스트의 Mix Tape 앨범이자 푸코와 라캉과 들뢰즈와 르장드르를 비롯한 자신이 공부한 철학자와 철학을 위한 Tribute 앨범, 일종의 헌정 앨범이다. 같은 멜로디, 같은 비트, 같은 사운드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절대 아니다. 팬이라면, 마니아라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사소한 다름이 차이를 만들어 우리를 일깨운다. 이것이 사사키 아타루가 들뢰즈와 라캉과 푸코와 르장드르와 그 외 다른 철학자들의 철학을 불러들여 자신의 글이라는 무대에서 그들에게 마이크를 넘겨, 듣고 싶은 Rap이다.


출간 목록은 다음과 같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즈마 히로키처럼 소설을 썼다. 그것들은 목록에서 제외했다.

맨 끝의 연도는 한국에서 출간된 연도다. 이 중 내게 없는 건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와 <이 나날의 돌림노래>이다. 이중 전자는 빌려 읽었으니, 읽지도 않은 책은 후자만 남았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사사키 아타루의 엄청난 팬처럼 느껴진다.


『야전과 영원─푸코, 라캉, 르장드르 』(박사논문 2008, 출판 2011)-2015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책과 혁명을 둘러싼 닷새 밤의 기록(2010)-2012

『제자리걸음을 멈추고─Anarekuta1』(2011)-2017

『이 나날의 돌림노래─Anarekuta2』(2011)-2018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Anarekuta3』(2011)-2017

『이 치열한 무력을─Anarekuta4』(2012)-2013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201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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