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43
“유령이 우리들 사이를 거리낌 없이 활보하고 있지만, 그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은 겨우 몇 사람뿐이다. 그것은 예전의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망령이 아닌 새로운 유령이다. 즉 완전히 기계화되어 최대한의 상품 생산과 소비에 열을 올리고 컴퓨터의 지배를 받는 사회이다. 이 사회 과정 속에서는 인간 자신이 기계 전체의 일부가 되어 충분한 식량과 오락을 얻으면서도 수동적이 되고, 생명을 잃고, 감정도 메말라 간다. 이 새로운 사회의 승리와 함께 개인주의와 사생활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조작하기 위해 심리학과 관련된 조건이나 여러 방법, 또는 새로운 종류의 환상 체험까지 이끌어 내는 약 따위가 쓰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 <희망의 혁명>, P.307., (동서문화사 판본 <악에 대하여/인생과 사랑/희망의 혁명/불복종과 자유>)
같이 일하는 감독은 AI, 특히 챗GPT와 같은 도구가 어지간한 작가나 카피라이터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눈치다. 그런 믿음 때문인지 15년 넘게 인연을 이어왔고, 그중 절반 이상은 직원으로서 홍보영상 시나리오 작가와 기획자, 카피라이터, 고객과의 협상가, PT와 같은 경우에서의 발표자의 역할을 해왔던 나의 기능과 수명이 다했다가, 혹은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인연은 올해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김재인 교수의 글의 인용한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인공지능은 사람의 지적 생산이 멈추는 순간 역사의 유물만 학습할 수 있다. 미래와 상상은 기계의 몫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창작 또한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우리 업계에서도 과거의 카피, 과거의 홍보 영상 시나리오의 답습과 반복, 무분별한 차용과 도용이 만연해질 것이다. 발주처들은 수 없이 많은 영상과 텍스트에서 조금씩 따온 “창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이것이 진정한 오리지널인지 의심해야만 할 것이다.
“수동적 기다림은 절망과 무기력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가면을 쓰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절망과 체념도 있다. 미사여구와 모험주의의 가면, 현실무시의 가면, 강요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가면이다. 거짓 메시아와 정부전복세력 지도자들의 태도다. 이들은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패배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는 자들을 경멸했다. 요즘에는 절망과 허무주의의 거짓 급진주의 가면을 열성적인 젊은 세대 사이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그 대담한 열성으로 사람의 이목을 끌어 모으지만, 현실감각, 전략적인 감각 그리고 일부에서는 생명에 대한 사랑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만다.”, 에리히 프롬, <희망의 혁명>, P.33(문예출판사 판본)
이 책은 1969년에 나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왔으며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품들은 6,7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다른 작품들 사이에는 내용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지만 같은 시기의 작품들 간에는 공통되면서 일관된 메시지를 읽어낼 수가 있다. 물론 사유의 상황과 대상은 다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소유냐 존재냐>에 담긴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소유냐 존재냐>가 소비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의 문제를 고민한다면 이 작품은 산업 사회, 특히 기계화되고 전산화되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와 자기 존재의 확신의 가능성, 더 나아가 산업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와 인간성의 유지 및 회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또 그 방법으로 여러 대안들도 제시하고 있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 그 이후부터 8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 소위 동서 냉전의 한쪽은 정치 사회적으로 보수화 되어갔지만 그에 반동적으로 문화와 예술에서는 자유와 반전 운동, 선명한 이데올로기의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표면에 불과할 뿐, 실제 삶은 무한 소비 사회로 급격히 빠져들고 있었다. 혁명이 좌절된 68년 이후, 그리고 베트남 전쟁 이후, 남은 건 대중문화와 무분별한 소비, 상업화되고 산업화에 복종을 자처한 대학만 남았을 뿐이다. 미국 대학의 총장으로 CEO 출신들이 오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대대적인 교육 개혁이 단행됐다. 선택지는 간단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응하여 그 일원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밖에서 낙오자로 살 것인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대학은 프랑스 이론을 수입하여 세속화되어 가는 대학에서 한 줌의 고상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 이 분투의 과정과 무의미함은 <루이비통이 된 푸코>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 일본과 독일 등에선 극좌파가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했다. 이후, 80년대엔 정치/경제적으론 레이건과 대처를 필두로 하는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물결이 고개를 들었고 신용카드를 이용한 소비 증진, 주식 시장의 활황, 일본의 성장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브래스드 오프>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민영화 반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실직이 이어졌으며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에 묘사된 혼자 볼링을 하는 사람과 같은, 원자화된 개인이 늘어났다. 앞서 언급한 두 에리히 프롬의 두 책은 이런 시대의 변화에 속절없이 휘말려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처방전이 되길 바라며 써졌다.
프롬은 인간이 새로운 미래를 위해 가져 왔고 현재도 가져 마땅해야 할 것으로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조건으로 지향, 전념, 경험, 가치관과 규범 등을 말한다. 이것에 기반하여 사회와 공동체를 움직일 아이디어로 지진 사람들이 기술사회와 산업사회에서 소멸되고 있는 인간 존재와 가치의 회복, 공동체의 복원, 인본주의적 시대의 도래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모든 것이, 미래에 대해 가져왔던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들, 산산이 부서진 희망과 수동적 기다림,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 등을 가진 사람들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우리가 컴퓨터에 모든 사실을 제공해 주면 컴퓨터가 미래의 행동에 대해 가능한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원칙이 뭐가 문제일까?”, P.107., (문예출판사 판본)
우리는 당연한 것들을 잊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잊고 있다. 중학생 딸이 수학 문제 푸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잊었거나 잃어버린 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는 과정을 잊고 잃었다. 우리는 생각의 시간을 잊고 잃었다. 우리는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가져야만 하는 인내를 잊고 잃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여 답을 구했을 때 찾아오는 희열과 만족을 잊고 잃었다.
더 나아가, 딸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학 문제를 함께 풀고 모르는 문제는 3학년 선배한테 물어보고 그 선배와 함께 풀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또, 우리가 잊었거나 잃어버린 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공부했었다. 지식은 공유됐고 먼저 배운 자는 나중에 온 이에게 배움을 나눴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했고 내 지식과 상대의 지식의 그 분야가 다르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었다. 나에 지식은 그에 결핍을 채웠고 그의 지식은 내 불안을 잠재웠다.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미래를 밝히며 함께 나가는 동료였다.
얼마 전 논문에 흰색으로 써진, 그러니까 숨겨진 명령어를 입력하여 AI로 동료의 논문을 심사하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을 속인 카이스트 학자들의 뉴스가 나왔었다. 비슷하게, 흰색으로 전체 글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문단을 삽입하여 학생들이 AI로 과제를 만들었을 때 프린트한 글의 내용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 작성되도록 한 교수들의 뉴스도 있었다.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본 AI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순간이다. 써진 것만 읽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걸, 읽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 순간이다.
역설적이게도 AI로 모든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글쓰기 선생을 찾는 사람은 늘고 있다. 나도 혹시나 해서 소위 고수를 찾는 사이트에, 지난해 말 프로필을 등록해 봤는데, 한 달에 두 세건 정도 꾸준히 의뢰가 온다. 물론 현재까지는, 어디 속한 사람의 입장이라 소위 견적서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어떤 사람이 글쓰기 스승을 찾는지, 그 유형을 지켜봤다. 다양했다. 나이도, 직업도, 목적도. 다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자기만 쓸 수 있는 글을 자기만의 목적을 위해 쓰고 싶은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왜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은 곧, 어쩌면, 사람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또 묻고 물어봐야 할 그 질문과.
사족
두 개의 판본이 있다. 문예출판사 판본은 <희망의 혁명>만 담긴 것이라 읽기는 편하지만 번역과 교정에 있어 아쉬움이 있다. 동서문화사 판본은 여러 저작이 들어 있어 그 두께가 상당하고 단어 선택이 딱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개인적으로 더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느껴진다.
후에 필요하여,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메시지가 유효하다고 판단되어 에리히 프롬의 저서를 읽어나가고 있다. 인문학 책 중에서, 사회와 심리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평이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물론 그의 대안과 결론은 이상적이지만, 그가 말했듯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다면 세상은 사람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