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45
“게임의 규칙은 영원하지 않다. 규칙 자체도 변해간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본래는 배제당해야 할 난폭한 플레이, 규칙위반, 해킹이 플레이어 공동체의 인정을 받고 정규 플레이로 변할 수도 있다.”, P.65
이 뒤에 나온 <정정하는 힘>에서 저자는 나이 듦의 본질 중 하나가 정정 가능성이라고 했다.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완고해진다. 과거의 영광을 등에 지고 산다. 정정은 고사하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마흔 이전에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책 한 권으로 일본 인문학계의, 그야말론 기린아로 올라선 그가 스스로를 계속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사업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바꿔가면서 오십이 넘은 뒤 세상에 내놓은 책이 저 책이고, 저 책과 뒤이은 책을 통해 사람이라면 응당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를 정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얘기다. 모든 게 그렇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건 놓기 힘들다. 변화를 밀어낸다. 운동은 좀 쉬웠다. 열 살 이후, 늘 운동을 하며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종목을 그만두기도 했다. 축구와 농구, 마라톤과 스포츠클라이밍이 그렇다. 등산도 좋아했지만 그것도 그만뒀다. 아내가 가자고 하거나 미국에서 처제가 와서 산을 보고 싶다고 하면 동행하며 가이드를 해줄 뿐이다. 지금은 수영만 하고 있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정정이다. 운동이라는 굵직한 테마를 유지한채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평생 카피라이터로 살고 싶었으나 세상의 변화에 따라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잘하는 것 중 잠시 잊고 있었던 것과 글쓰기를 중심에 놓고 변화를 꾀한다. 어느 책 제목처럼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 새 옷을 입혀 내일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늘 하는 수영이지만 더 잘하기 위해 폼을 교정하고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여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겹하기의 역설과 고유명의 역설은 둘 다 기호의 소행적(溯行的) 정정 가능성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믿고 언어나 기호를 사용한다. 하지만 의미를 혼자 확정할 수는 없다. 자신은 어떤 말을 의미한다고 확신하더라도 나중에 ‘너는 사실 같은 언어로 다른 것을 의미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원리적으로 반론할 수 없다...... 소행적인 가능성 자체는 어디에나 차고도 넘친다.”, P75
소행(溯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한 말, 내가 정한 신념, 품은 이념이 지금의 현실에 맞지 않다면, 그것이 오류임이 드러난다면 그 과거로 가서 그것을 철회하거나 정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오류의 인정이고 정정의 소급 적용이다.
인생도, 공동체도, 게임도 정정 가능성에 열려 있다. 우리가 진리라 믿었던 것들도 외부의 누군가로 인해 정정당할 수밖에 없다. 정정하기 싫으면 외부로 향한 문을 닫아야 한다. 영화 <빌리지>의 은유다. 사실 <빌리지>는 상처받기 싫은 사람들이 외부로 향한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신만의 규칙을 세워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문은, 결국 열릴 수밖에 없는데, 내부의 질병을 내부의 것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였다. 밖에 있는 아주 간단한 약만으로도 치료될 수 있다면 문을 열어야 한다.
앞서 저자가 사용한 겹치기라는 단어는 쉽게 말해 더하기의 다른 규칙을 사용하는 가상의 외부인의 계산법에 저자가 붙인 이름이다. 우리는 다 2+2=4라고 알고 살아왔는데, 외부의 누군가가 “아냐, 두 개 위에 두 개를 포갠 것이니 2야. 너희들 잘 못 알고 있구나.”하고 말했다고 하자. 이 경우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정정하던가, 외부인을 몰아내던가. 그런데 만약 그 외부인이 공동체의 혁신과 성장을 가져올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외부로 향한 문을 열어야 한다.
“일반의지는 인민 주권에 근거를 부여하는 절대적 힘의 원천인 동시에 항상 정정의 역동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P.265
공동체를 유지하는 건 일반 의지다. 루소의 말이다. 한 개인의 특수한 의지도, 그 의지의 합도 아닌, 공동체가 공유하는 고유한 의지다. 철학이라 불러도 좋다. 그 일반의지가 완고하면, 즉 정정 가능성이 없다고 선언해 버린 후 그렇게 살아버리면 전체주의가 된다. 북한처럼, 히틀러의 독일처럼, 탈레반처럼 된다. 일종의 교조주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알다시피 헌법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정정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최종 수정은 1987년이었다. 놀랍게도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정한 적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저자가 주장하듯, 알고리즘과 빅 데이터는 변화의 싹을 안고 있는 타자를 인지하지 못한다. 약간의 다름, 차이, 변덕을 무시한다. 아니, 어찌 보면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한다. 어딘가에 속해 있어야 한다. 계산되고 수렴되는 나여야만 한다. 결국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다닌다. 인터넷 게시판과 커뮤니티에 서식지를 마련한다. 철새 같은 존재가 텃새가 되어버린다. 그 속에서 자기들만의 사상을 정립하고 거기에 맞는 의견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증거만 모아서 편협하고 편향된 주장을 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깔아뭉개는 데만 혈안이다. 저자가 예를 들었듯이, 고유명사인 소크라테스의 명제 중, “소크라테스는 남자이다.”라는 자명한 사실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사실은 여자였다는 고고학적, 역사적 증거가 나오면 별 수 없다. 소행하여 정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계속 정정하며 산다. 변주(變奏)의 연속이며 연주 상황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편곡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음악이다. 오늘, 부산국립국악원에서, 영어영재 체험학습을 하는 딸을 기다리기 위해 내부에 있는 북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가져간 내 책을 읽다가 서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양을 쫓는 모험>이 눈에 들어와서 읽었다. 읽다 보니 뒤이어 나오는 그의 소설들의 장치들이 거의 다 나온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도, 취향도, 사건의 전개도 그렇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다 다르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무라카미 하루키 예찬론인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같은 주제, 유사한 이야기의 끊임없는 변주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형적인 모험담이자 남자의 성장기의 원형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원형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여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름과 변화 속에 거대한 이야기 줄기를 밀고 나간다. 흔들림 없는 삶의 철학이 있지만,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도 유연하게 탄다. 방향타를 움직이고 돛을 올린다. 바람의 소리를 듣고 물살의 변화를 읽는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낡고 닳은 자신의 신체도 살핀다. 오래된 범선의 선장처럼, 연한이 다 된 전투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처럼 스스로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살피며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 정정해 가며 미지의 내일을 향해 간다. 그것만이 결국 개인도, 공동체도, 더 나아가 사회와 나라도 지속되는 유일한 길 아닐까.
쉰이 넘은 그에게서 삶에 대한 깊은 시선이 느껴진다. 이어 나온 <정정하는 힘>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정정 가능성의 철학>의 활용편 같은 것이다.
번역된 그의 책 중에서 <존재론적, 우편적>, <일반의지 2.0>과 소설인 <퀀텀 패밀리>만 읽지 않았다. 이 책에 <일반의지 2.0>에 대한 내용과 정정이 함께 실려 있다. <존재론적, 우편적>은 갖고 있으나 읽다 말았다. <정정하는 힘>을 다 읽고 그리고 넘어갈 생각이다. 아무리 그가 쓴 것이라도 소설엔 별 관심이 없다. 미안하다.
같은 맥락에서, 번역된 사사키 아타루의 책, 특히 아날렉타 시리즈 중에서 <이 나날의 돌림노래>만 읽지 않았다.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는 읽은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아 살짝 당황했는데, 서평을 검색해 보니 대출해서 읽었다. 두 권은 기회가 되면 사서 읽으려 한다.
두 사람 다 잘 쓰고 잘 떠든다. 이러기 쉽지 않은데, 둘 다 공부도 빡세게 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도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일 것이다. 무대 체질인 것도 있고. 이런 면에서, 지바 마사야는 좀 얌전한 편인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