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내면, 혹은 그 뒤의 시간들

딸과 함께 꽃을 보네 35

by 최영훈

기다리지 않는 꽃

내가 본 꽃 중에서 가장 못 생긴 꽃은 호박꽃이다. 통상적으로 호박꽃은 못 생긴 사람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그 호박꽃이 이웃집에 폈다. 딸의 방에서 내려다보면 더 잘 보인다. 몇 개의 꽃은 할 일을 다 하고 그 자리에 호박을 부풀어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다. 우리 빌라 후면 화단에도 호박 덩굴이 자리하고 있는 데 꽃은 피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았으니 당연히 호박도 열리지 않았다. 호박꽃의 색은 호박의 겉과도 잎과도 닮지 않았다. 물론 꽃이 열매의 색과 전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 그런데 가지는 꽃과 잎과 줄기의 색이 거의 비슷하다. 볼 때마다 신기할 정도다.


열매가 주인공인 식물의 꽃 중에 우리의 기다림을 부르는 꽃은 봄에 피는 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고추 꽃이나 부추 꽃 - 둘 다 하얗고 아담하다. - 이 등장하는 여름도 있지만, 그 꽃들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은유가 되지는 않는다. 난 이때까지 “아, 여름이니 슬슬 고추 꽃이 피려나.”하며 고추 꽃을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한 해 농사의 운을 고추에 건 농부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농부의 염원조차 당연히 고추로 향하지 꽃에 향하지 않는다. 제 3자에게나, 약간 취향이 특이한 사람이나 고추 꽃을 기다릴 것이다.


카피라이터의 퇴장과 AI

해고라면 해고를 당한 뒤, 독서 교육과 글쓰기 시장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이 또한 역설이라면 역설인데, 감독이 날 내보낸 데에는 Chat GPT가 한몫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얘가 부리는 재주에 흠뻑 빠진 감독은 내게 그 사용을 강권했다. 간단한 카피와 시나리오, 심지어 기획서 초안까지 얘한테 맡기면 된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마치 새로 뽑은 똑똑한 젊은 직원 자랑하듯이 말이다. 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훨씬 전부터, SNS로 인연을 맺는 이들이 Chat GPT를 시켜 쓴 에세이를 꾸준히 지켜봐 온 나로서는 그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알고 있었다. 세상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느껴졌고, 특히 지역 및 지방색과 같은, 통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수치적으로 드러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언어로도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정서적인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느껴졌다.


여전히 광고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마음의 언어를 포착하는 일이라 믿고 있는 내게 저 똑똑한 “젊은 사원”의 재주는 아직 부족해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내가 해고된 데에는 저 “젊은 사원”의 역할이 컸다. 저 친구만 데리고 있어도 그럭저럭 일을 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감독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 믿음이 불황의 시기에 더 증폭되어 뒷방 늙은이 같은, 오래된 턴테이블 같은 카피라이터의 해고라는 결단을 더 빨리 불러왔을 것이다.


문해력의 공포

반면, 세상은 문해력의 공포에 젖어 있다. 오늘 아침에도 어린이집 알림장에 있는 “금주 행사”라는 말을 술과 관련지은 부모가 왜 술도 안 마시는 애들이 술 관련 행사를 하냐며 전화로 항의를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초등학생들은 3학년 때부터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4, 5학년 학생들은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들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학생들에게 국어는 공포스러운 과목이고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문제를 포기한다. 영어 단어의 뜻 중, 알지 못하는 "국어"로 써진 뜻은 외우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뉴스에서 나온 것처럼, 교육부가 지난해 발표한 ‘제4차 성인문해 능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146만 명(3.3%)은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비문해’ 성인으로 나타났다. 문해 능력 ‘수준 1’에 해당하는 비문해 성인은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의 학습이 필요하다.


역설적인 상황이다. 글을 제대로 못 읽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흔해서 그 아이들에게 글을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독서가 성적을 좌우한다는 말을 들은 학부모들이 공포에 절어 아이들을 속속 “독서 전문” 학원에 보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즘 가장 많이 들어서는 학원은 “독서 전문” 학원이다. 독서가 어떻게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분명한 건 독서와 글쓰기는 사교육의 블루 오션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호박꽃과 무화과의 막연함

호박꽃만큼 못 생긴 꽃도 없지만 호박꽃만큼 큰 열매를 만드는 꽃도 흔치 않다. 시골에서는 어지간한 수박만 한 호박도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꽃이 열매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 꽃을 보는 사람들은 뒤이어 올 열매를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 열매에 빠져 꽃의 존재를 잊기도 한다.


얼마 전 일이다. TV를 보는데, 해남에서 무화과 농사를 크게 짓는 농부가 나왔다. 그 농부가 무화과(無花果)의 뜻을 설명하는 데, 말 그대로 꽃이 없이 맺히는 열매라 그리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세상에 꽃 없이 열매를 맺는 과일이 있던가, 그거 참 신기하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날 밤, 문득 생각이나 무화과에 대해 검색했다. 알고 보니 무화과는 우리가 열매라고 아는 그것이 꽃이었다. 꽃이 밖으로 펼쳐 피지 않고 안으로 농축하여 피어 그 안에서 지들끼리 수분을 한다고 한다. 알다가도 모를, 생명의 신비다.


그 방송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농부는 무화과를 바로 땅에 심지 않고 흔히 보는 플라스틱 우유 상자만 한 곳에 심어 키웠다. 리포터가 그 이유를 물으니 무화과의 단맛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당연히 리포터는 이어 물었다. 땅에 그냥 심은 것과 조그만 상자에 넣어 심은 것이 단맛의 농도가 다른 것이 언뜻 납득이 안 갔기 때문이다. 농부의 설명은 이랬다. 그냥 땅에 심으면 무화과는 땅 밑으로 흐르는 물을 양껏 들이마셔 당도가 물에 의해 희석되어 떨어지는 반면 조그만 상자에 담긴 흙에 심으면 제한된 물로 인해 당의 농도가 더 진해진다고 한다. 그 설명을 들은 후 제법 많은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 보면 무화과나 호박꽃이나 그 꽃의 용도가 보기 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호박꽃은 터무니없이 큰 꽃을 여름볕에 내어 놓은 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사라진 뒤, 그 자리에 박을 대신 내놓는다. 처음엔 얼마나 클지 짐작도 안 간다. 매화꽃이 진 자리에 나오는 매실이 그 크기가 고른 것과는 달리 호박의 크기는 다 제 각각이다. 그 꽃의 겉모습만으로는 미래에 도래할 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무화과는 그 반대다. 꽃이 곧 열매다. 안으로 농축되는 꽃이다. 사람은 그 꽃을 보는 대신 먹는다. 다른 꽃처럼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향이 좋은지 알 수 없다. 그 꽃의 속을 보기 위해선 깨고 들어가야 한다. 예상과 짐작은 아무 소용없다.


사라진 의리

느닷없이 닥쳐온 해고의 굴레를 짊어지고 여름을 관통하고 있다. 보름쯤 후, 실업 급여 관련하여 감독과 통화했을 때는 함께 계속 일을 하는, 발전적인 관계를 모색해 보자던 감독은 한 달쯤 후에는 선선히 관련 서류 작업을 해주겠다고 했다. 4대 보험 등, 서류상으로는 올해까진 직원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그의 다짐은 새로 들어온 인터넷 쇼핑 영상과 같은 자잘한 일속에 사라진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는 그런대로 밝아보였고 그 목소리로 그는, 흔쾌히 서류 작업을 진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젠 공식적으로, 나라가 인정하는 실업자가 된 것이다.


물론 그 사이, 그러니까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구직 사이트를 통해 열 곳이 넘는 곳에 이력서를 냈다. 대부분은 독서와 글쓰기 관련 학원이었다. 글쓰기라면 몰라도 독서를 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는지, 그렇게 배운 독서방법이 학업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더 나아가 그렇게 배운 독서가 평생 독서 습관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반신반의하지만, 딸을 보면 분명 독서를 하는 아이가 학업에서 앞서가고 학업은 물론이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한다는 건 확실해 보이기에, 누군가 아이들에게 독서를 가르쳐야만 한다면 딸을 직접 독서의 세계로 이끈 아빠인, 나만한 적임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또한 글쓰기를 가르쳐야만 한다면 이 역시 나만한 적임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면접을 보자는 연락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계속 나와 일하고 싶어 해서 내 4대 보험을 연말까지 내어주겠다는 감독의 신의에 부응하기 위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감독의 부름과 미팅의 동행을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 혹은 오전이나 오후만 일하는 프리랜서 강사 일을 중심으로 다방면으로 넣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고, 마치 별거와 같았던 감독과 나 사이는 이제 서류상으로도 이혼한 부부와 같은 관계가 됐다. 감독의 마지막 카톡 메시지는 “가시더라도 필요한 것 있으심, 연락 주세요~”였다.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이제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그 꽃의 기분

지고 있는 호박꽃이 된 기분이다. 지고 있는데 뒤이어 올 호박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아니 나오기나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앞집에 있는 호박넝쿨엔 꽃이 피었고 그중 몇몇 꽃은 제 때 져서 박을 달았는데 우리 빌라 옆에 있는 넝쿨엔 꽃이 피지 않았다. 무성한 잎만 벽을 가릴 뿐이다. 결국 꽃의 막연함은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음을 뜻하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이런 생각을 했다.


또, 무화과를 생각했다. 속을 못 보여주는 무화과가 된 기분이다. 누군가 베어 물기 전까지 자신의 단맛을 알릴 방법이 없는 무화과. 꽃이 세상을 향해 피지 않으니 그 꽃의 아름다움도 애초에 없고, 단맛에 끌려오는 벌도 나비도 없다. 안으로는 단맛이 다져지는데 겉은 그저 초록이니 단맛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안으로만 삭힌다. 딱 내 꼴이다.


수요일, 운동마저 내팽개치면 안 될 것 같아 수영을 가기로 마음먹고 오리발을 챙겼다. 오리발엔 내가 직접 쓴, 다른 사람의 것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낙서가 있다. 한쪽엔 내 서명이, 한쪽엔 카피라이터가 영문으로 적혀 있다. 오리발을 챙겨 넣으면서 군데군데 지워진 Copywriter라는 낙서를 보다가 울컥했다. 서른에 시작한 일이 쉰이 넘어 끝났다. 그 사이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명함에 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애를 써 왔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그 끝이 온 것 같다. 그 세계에서 쫓겨난 기분이다. 잘 가라, 나의 삼십 대와 사십 대, 그리고 카피라이터였던 그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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