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만남 4. 지속가능한 독서가의 조건

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12

by 최영훈

학원에서 가르치는 독서?

독서를 대하는 다른 자세를 말해보려 합니다. 이 또한 꼭 아이가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봅니다. 어찌 보면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아주 가볍게 보는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요. 요즘엔 부모님들이 문해력이라는 단어 앞에서 약간의 공포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책을 많이 읽히고 심지어 이를 위해 “독서” 학원에 보낼 정도죠. 제가 사는 동네에도 독서 학원을 표방하는 소위 브랜드 있는 학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불과 1,2년 사이에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죠.


혹시 이런 곳에서 상담을 받아보셨나요? 그 브랜드의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살펴보신 적이 있나요? 전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둔 뒤 이 쪽일, 특히 독서와 논술, 글쓰기, 고등학교 비문학 교육 일에 뛰어들기 위해 제법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유명 브랜드 학원에는 직접 면접을 보러 가기도 했죠. 그 결과, 전 상당히 놀랐습니다.


우선은 아주 과학적으로 아이의 문해력을 측정해서 그 수준을 관리해 준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다음으로는 아주 수준 높은 교양 인문 서적을 교재로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엔 특정 브랜드의 학원이 주로 그러지만 말이죠. 마지막으로는 학원이라는 공간과 선생님, 프로그램을 오직 독서를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점에도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정규과목인 수학, 영어, 국어처럼 독서를 하나의 교과목으로 간주하고 아주 전문적으로 “가르치기로” 작정한 느낌을 받았죠.


불가능한 벼락치기

물론 이게 당연하겠죠. 그래야 학부모가 돈을 쓸 때 합당한 기분이 들 테고 아이도 “학원”에 가서 독서를 “배운”다고 느낄 테니까요. 그래서 바로 독서가 끝나면 시험도 치고 진도를 나가듯 책을 읽는 것이죠. 전 이런 학원들의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얼마나 오래 독서를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됩니다.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독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는 것이죠.

앞선 글에서 얘기했듯, 독서력은 서서히 올라가고 문해력과 국어 실력은 물론이고 독서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모든 지적인 능력 또한 단숨에, 벼락치기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나이에 맞는 책, 수준에 맞는 책을 차근차근 읽어간 끝에 얻어지는 것들이죠. 중학교, 고등학교 때 국어가 쉬운 애들은 영ㆍ유아 때부터 책을 읽고 좋아하기 시작해서,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자기도 모르게 그 학업 수준에 맞는 능력이 체득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어느 유명한 교육 컨설턴트의 말이 생각나네요. 가장 선행이 의미 없는 과목, 선행 자체가 불가능한 과목이 국어라는 말이. 전 독서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독서를 해서 평생의 습관으로 정착시켜야 읽은 것이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경영학적인 말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단기적, 일회성 성과를 지향하는 독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독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선, 당연하게도 지속가능한 독서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속가능한 독서의 조건 1. 책 읽는 아빠, 수다스러운 엄마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독서의 토대 형성의 조건은 뭘까요? 우선은 부모 중 한 명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도록이면 열심히 말이죠. 그 부모는 그야말로 약간의 짬만 나도 책을 펼쳐 들어야 합니다. 지하철을 타거나 카페에서 누굴 기다리거나 할 때,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행을 갈 때도 책 한 권쯤은 여행 가방에 챙겨 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서점을 만나면 들어가 보고 관광지나 호텔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책자는 무조건 펼쳐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V가 볼 게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책을 집어 들고 집에서 보내는 주말이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저처럼 맥주 한 잔 놓고 베란다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졸다가 해도 된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아니 시간 있을 때 책 읽는 거 말고 따로 할 게 있나?”하고 반문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부모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 집에선 제가 그 역할을 합니다. 그럼 아마 이런 질문이 떠오르겠죠. 엄마, 아빠 모두 책을 읽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전 이 의견엔 솔직히 반반입니다.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좀 역설적인 얘기지만 책 그 자체에 너무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것에 전 반대합니다. 책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로 책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에, 책이 마치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인 것 마냥 생각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읽을 책이라면 일종의 기호식품, 취미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할 취미 정도로 말이죠.


래서 전 아내가 직장에서의 공문서와 관련 분야의 보고서를 제외한 여타의 책들을 열심히 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대신 은채와 함께 공연과 영화를 보러 다니고 매주 운동 삼아하는 발레에도 데려가면서 제가 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고 있죠. 게다가 맛있는 디저트 가게도 찾아서 가고 예쁜 옷과 화장품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토론을 하죠. 함께 드라마를 보면서 수다를 떠는 동안 딸의 공부 스트레스도 줄여주고 딸에게 재미있는 드라마를 추천해 주고, 받기도 합니다. 엄마는 딸의 쉼표 같은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죠.


지속가능한 독서의 조건 2 - 전집의 퇴출

두 번째는 전집의 퇴출입니다. 어떤 형태의 전집이든 집 안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전 여기엔 타협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집만큼 쓸모없는 책도 없습니다. 백과사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집과 백과사전은 강박적입니다. 태생이 그렇죠.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망라하겠다는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사전파의 강박이 전집과 백과사전 안에 처녀귀신, 총각귀신의 원혼처럼 서려 있습니다. 그 전집을 들여놓는 부모님들은 대체로 그 원혼이 불러온 두려움에 굴복하여 전집을 들여놓은 것이고요.


같은 맥락에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은 얕은 지식>류의 책도 탐탁지 않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요즘 세대들은 모든 걸 아는 척하거나 모르는 건 철저히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요. 전자의 경우엔 저런 류의 책을 통해 얻은 광범위하나 깊지 않은 지식에 근거한 위태로운 자신감일 테고 후자의 경우엔 "내가 왜 그걸 알아야 돼"하는 생각일 겁니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의 원인으로 후자의 마인드를 꼽는 전문가도 있을 정도죠. "내가 평소에 쓰지도 않는 어려운 단어를 굳이 알아야 돼? 왜 평소에 쓰지도 않는 어려운 단어를 쓰고 난리야."라는 마인드 말이죠.


<생각의 싸움>에서 김재인 교수가 한 말을 응용해 말하자면, 책을 읽는 자세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되 감히 다 알려고 하는 열린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연하면 모르는 것 자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가 모르는 걸 아는 사람에게 배우려 하고, 알고자 하는 것을 향해 묵묵히 정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아이가 한글을 떼기도 전에 들여놓는 그 무수한 전집들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독서란 결국 앎을 향한 여정이고, 그 여정은 무지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알아가는 과정의 즐거움, 그로 인해 서서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자신의 지적 세계의 체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적인 환희를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등산의 은유를 기억하시죠? 전집은 세상의 모든 산과 그 오르는 법에 대해 써놓은 책과 비슷합니다. 그 책을 다 읽어 세상의 모든 산에 대해 낱낱이 알고, 모든 등반 루트를 꿰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산을 실제로 오른 사람과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뭘 하나를 알아도 차근차근 알아가는 사람과 요약된 걸로 아는 사람과는 그 지식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산하고 비교하면, 하나의 산을 제대로 오른 사람은 다른 산을 오를 용기와 꾀가 생깁니다. 즉 하나의 높은 산을 오른 경험이 새로운 산을 오르는 힘이 된다는 것이죠. 전 책도,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유명한 운동선수들이 나온 TV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은퇴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집이 등장하는 그런 프로그램말이죠. 그런 프로그램에는 어김없이 그 선수들이 획득한 메달과 트로피가 쭉 진열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메달과 트로피,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딴 걸 까요? 아니죠. 선수 생활 내내 대회에 참가해서 하나씩 획득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의 결정체죠. 더 생각해 보면 그 메달과 트로피가 대회의 결과물에 불과한가요? 아닙니다. 그 대회를 위해 훈련한 시간, 들인 노력, 흘린 땀이 모두 녹아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책꽂이와 서재는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처음 읽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의 지적인 여정이 온전히 녹아들어 있는 곳이 곧 서재이죠. 그런데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에게 가득 채워진 책꽂이를 선사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미 완성된 세계를 눈앞에 둔 느낌일 겁니다. 나 자신을 알아가기도 전에, 세상을 하나씩 배워가기도 전에 완성된 나 자신과 세상이 눈앞에 뚝 떨어진 느낌일 겁니다. 그 순간, 확신하건대, 지적인 욕구는 싹 사라질 것입니다. 책을 읽을 맛이 뚝 떨어지는 것이죠.


늘어나는 책꽂이, 확장되는 세계

서른 즈음에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제 책꽂이는 세 칸 정도였습니다. 조립식이어서 낱개로 사서 조립한 뒤 위에 쌓을 수 있는 형태의 책꽂이였죠. 그 뒤로 전 같은 브랜드의 책꽂이를 주기적으로 샀습니다. 책이 늘어났으니까요. 그런데 그만큼 또 많은 책을 버리고 팔았습니다. 새 책이 들어오면 헌 책이 나가고, 제 세계관이 변했거나 지적인 세계의 범위와 수준이 변하면 과거의 책은 퇴출되는 것이 당연하죠. 극단적인 예로 더 이상 교회를 안 다니기로 작정한 이후 갖고 있던 백여 권에 달하는 종교서적을 지역의 성당에서 운영하는 중고 물품 가게에 기증하기도 했죠.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요.


은채도 같은 과정을 겪었습니다. 아기일 때 봤던 동화책들을 아빠와 함께 팔아보기도 했고 필요한 동생들한테 주기도 했죠. 더 이상 쓰지 않는 장난감을 다녔던 어린이집에 기증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 빈자리는 다른 책들로, 수준이 높아진 책, 다른 주제의 책들로 채워졌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열심히 읽었던 <시공주니어 문고>도 이젠 붙박이 책꽂이의 상단, 안 보이는 수납함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또한 어린이집이나 친구의 동생들한테 줄 예정입니다. 결국 책꽂이의 책은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보여주는 나이테 역할을 합니다. 하나의 나이테가 새겨질 때마다 책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오고 나가죠. 이 과정을 아이 스스로 겪으면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고 지금의 수준에 뿌듯해하는 것은 지적 성장의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경험입니다.


부모의 역할

앞서 언급한 “독서” 교육을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 학원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중등 과정이 끝이라는 겁니다. 고등과정은 없죠. 당연하다고 봅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문해력, 독해력, 국어 실력이 월등히 좋아질 가능성은 적으니까요. 그러니 학원 입장에서는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설령 그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건 고등학교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시기로 잡은 것이겠죠.


문해력이 됐든, 독서력이 됐든, 그리고 요즘 화두가 되는 독해력이 됐든, 심지어 집을 팔아도 안 된다는 국어 실력이 됐든 결국엔 관건은 누적의 힘입니다. 질러갈 수 없고 벼락치기할 수 없으며 요행을 바랄 수 없다면 일찌감치 마음먹고 묵묵히 단계를 밟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첫발을 막 떼려 하는 아이 옆에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최초의 친구이자 스승이죠. 독서와 지적인 세계를 여행하는 동반자이기도 하고요.


어렵더라도, 책과 거리를 둬온 삶이었다 하더라도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면 부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 책을 펼치는 겁니다. 마주 보고 책을 함께 보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산을 오를 준비는 된 겁니다. 서두르지 말고, 앞서가려 하지 말고 묵묵히, 산 하나하나를 오르고 내려오는 마음으로 함께 지적인 세계를 여행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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