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이 실력이 되는 순간 1 - 초등학교 1~3학년

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13

by 최영훈

정보 없이 키운 아이

전 은채의 친구들 부모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습니다. 마흔에 아빠가 됐으니까요. 주변에 애를 낳아 키우는 친척은 고사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 은채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양육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죠. 그래서 사교육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좋은 유치원이나 영어 유치원에 보낼 생각도 없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을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아내는 직장에서 이런저런 육아정보를 들었지만 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서 제일 가까운 어린이집에, 그것도 집에서 아빠랑 노는 게 심심해 보일 때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때문에 은채는 네 살 즈음에 처음 어린이집에 갔죠. 그전까진 아빠랑 공원이나 다니고 산책이나 하면서 꽃과 나무를 보는 게 다였죠. 낮에는 뽀로로를 보고 저녁에는 동화책을 읽어줬습니다. 더 할 게 있나요? 더 바랄 게 있나요? 건강하고 자기 의사 표현 정확하고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누우면 자고 때 되면 일어나고 그럼 된 거죠. 어린이집에 바란 것도 딱 그 정도였습니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밥 잘 먹고 잘 놀고, 제 기준은 그랬습니다.


나도 배우고 싶다는 욕망

첫 번째 어린이집이 네 살 반까지 밖에 없어서 집 근처 어린이집으로 옮겼습니다. 그 후, 은채는 뭔가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제가 때가 되어서 가르친 게 아닙니다. 은채가 먼저 가르쳐 달라고 한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꼭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은채는 우선,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집에 갔더니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게 부러웠는지, 아니면 시샘이라도 났는지, 여하간 저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교재를 사서 가르쳤죠.


좀 있으니까, 친구가 두 자릿수 더하기를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면서, 자기도 그런 걸 배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수학이야 저나 아내나 관심이 없으니 이 기회에 학습지 하나를 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때 인연을 맺은 선생님은 은채가 투병으로 입원할 때까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겨울까지 은채의 수학을 책임져 주셨죠. 은채가 투병에 들어갔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 선생님이 아내와 통화하면서 전화기 너머로 우시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은채는 한글과 간단한, 그야말로 산수 실력만 갖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처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은채가 집에 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줄 때, 그런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뭔가 잘 못 됐다.


1학년 때 드러나는 부모의 실수

급식을 안 먹은 아이,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아이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 중에 화장실을 가겠다고 벌떡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겨우 1학년이니까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 애도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아이의 언어 능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일부러 집에 전달하라고 한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애들도 너무 많았습니다.


이건 분명 문해력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뭔가, 다른 중요한, 다른 성격의 문제였죠. 이 성격의 문제는,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단순히 어릴 때만, 1학년 때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뭔가가 있었죠. 그리고 그 문제는 초등학교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학교와 공부를 대하는 태도

이 문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태도입니다. 오랫동안 공부한 광고학과 이와 관련한 설득 커뮤니케이션에선 태도를 하나의 사안이나 문제에 대해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일관된 마음가짐과 이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실천을 말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특정 제품이나 이슈에 대해 일관되게 갖고 있는 마음과 그 마음으로 인해 행하는 일련의 일관된 행동을 의미하죠. 순서를 바꿔 얘기하면 한 사람의 일관된 행동은 그 마음 안에 단단히 들어앉은 견고한 마음가짐 때문이라는 얘기죠.


전 이게 공부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요즘에는 말이죠. 알다시피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학교는 신성한 공간이었고 선생님과 교수님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어떤 학생이든 그 공간과 그 존재를 우러러보며 그에 맞는 학생이 되기 위해 애를 썼죠. 그야말로 문제학생은 손에 꼽힐 정도였던 시대였습니다. 문제학생은 학교 밖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나가야만 했죠. 요즘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은 이 시대의 학교를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라며 폄하하기도 하는 데, 공간과 레벨의 성격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과거의 공간과 낮은 레벨의 태도가 수용되길 원하는 건 어쩌면 가치관과 태도가 없는 일종의 아노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 강사를 하던 2004년에서 2014년, 대략 십여 년 동안에도 대학과 교수, 심지어 저같이 한낱 강사에게도 권위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강의를 잘하는 교수와 강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고 좋은 강의를 듣기 위해서 수강 신청 기간이 시작되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선배는 후배에게 교수와 강사의 좋은 강의를 추천했고 후배는 그 추천을 귀담아들은 뒤 강의를 신청하고 들었습니다. 학기 첫날, 강의실엔 기대와 설렘이 공존했고 들어오는 강사와 교수에 대한 존경 어린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 시선 앞에서 강사와 교수는 한 학기 제대로 강의를 해내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할 수밖에 없죠. 이러한 상호 존중의 태도가 대학의 권위와 가치, 그리고 강의의 질을 만들었습니다.


성장과 변화의 당연함

요즘엔 달라졌습니다. 아이가 학교와 선생님에게 가져야 될 몸가짐과 마음가짐, 즉 태도에 대한 요구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선 학교와 선생님이 아이에게 맞춰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학생이 학교가 변하길 바라는 것도, 학교와 담임선생님이 자기 아이에게 맞춰주길 바라는 것도 일종의 학교와 교사, 더 나아가 교육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는, 합당한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 분명 아노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장은 곧 변화입니다. 성장은 신체와 마음의 성장이고 그 둘의 성장은 변화를 가져오죠. 대부분의 성장의 순간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만 어떤 성장은 인위적인 결심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도약의 순간이 필요한 것이죠. 아이가 클 때를 생각해 보면 젖병을 떼고 이유식을 먹을 때도, 배변 교육을 할 때도, 젓가락질을 배울 때도, 앞서 말한 한글과 산수를 배울 때도 아이 스스로 단호한 결심이 있었습니다. 걸음마처럼, 말처럼 그저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죠.


어린이집에 가서 친구들을 보고 동생들을 보면서 언니가 되고 오빠가 되면 내가 동생들하고 뭐가 달라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죠.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을 성장의 순간으로 받아들였다면 변화해야 합니다. 유아의 태도에서 어린이의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린 시절, 부모님이 늘 하시던 말씀은 바로 이 태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바로 그 익숙한 당부가 말이죠.


그런데 종종, 부모들이 이걸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아이만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집에서 키우던 방식대로, 집에서 보호받던 방식대로, 학교 가기 전의 영유아를 교육하고 양육하던 방식대로 학교에서도 해주길 바라는 것이죠. 이런 부모의 태도는 자치 잘못하면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학부모 갑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툭하면 민원을 넣겠다며 교사를 위협하는 학부모의 전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아이에게 더 넓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기회를, 이를 위해 필요한 태도 형성의 그 소중한 기회를 부모가 박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퇴행이죠. 아이도, 부모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도와 학습의 관계

태도는 왜 문해력, 독서, 독해, 더 나아가 학습과 관련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마음가짐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거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일관된 것이죠. 즉, 학교와 선생님을 자기가 다녔던 어린이집과 그곳의 선생님과 더 나아가 가정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인식하고 인정하여 그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순간, 아이는 올바른 학습자의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당연하게도, 이런 자세는 집중력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알다시피 초등학교 1학년이 가장 배우기 힘든 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수업의 경우엔 선생님을 향해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은채도 입학한 후 책상에 바로 앉는 법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모두가 알다시피 공부는 단순히 지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학습량이 많아질수록 공부를 대하는 태도와 함께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일수록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뚝심 있게 그 계획을 실현하죠. 얼마 전 모 방송에 나왔던 개그맨 오정태 씨의 장녀가 그 실례를 보여줬죠. 그 아이의 공부 계획과 수학 문제 풀이만 보고도 입시 관련 전문가는 아이가 인재임을 알아봤습니다. 그것은 지능의 확인이 아니라 집중력과 인내심, 실행력, 궁극적으로 아이가 공부를 대하는 마음 자세의 확인이었죠.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공부를 대하는 자세가 확고하게 자리 잡히지 않으면 고학년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수포자가 처음 발생하는 시기도, 문해력 부족이 체감되는 시기도 바로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막 넘어가는 시점부터입니다. 저때부터 아이들은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죠.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어떤 아이들은 사회를, 어떤 아이들은 국어와 영어를 포기하게 됩니다. 후에, 만회할 기회가 있을까요? 저 시점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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