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 현상 1-끼리끼리가 편한 이유

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20

by 최영훈
“문법은 의미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 담화의 의미가 완전히 결정되는 것은 시장과의 관계 속에서다. 의미를 실천적으로 규정하는 요소들의 일부는, 이는 작지 않은 부분인데, 담화의 바깥에서 자동적으로 온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으로 전형화된 어떤 화자가 제공하는 언어적 산물과, 주어진 사회공간 안에서 동시에 제안되는 산물들 사이에 관계를 설정한다. 언어의 유통 속에서 생성되는 객관적 의미의 근원에는 이렇게 생겨난 차별적 가치가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 「언어와 상징권력」, P.29


“대부분의 제품은 그들이 사용하는 사회적 용도로부터 사회적 가치를 얻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 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P. 52

와닿지 않은 구별과 차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세기말이었습니다. 계층별로 취향과 사용하는 언어가 세분화된다는 프랑스 학자의 말은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 논리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죠. 전근대적이며 구시대적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던 것이죠. 우리 부모님 세대에선 대학생은 곧 지식인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도 모르는 걸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동네에 대소사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청년이 지어줬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대학생이 절대적 소수였기에 대접을 받았고 존중을 받았죠. 그들은 국가의 발전에 공헌했고 민주화에 앞장섰습니다. 어른들도 그걸 알았기에 그들을 단순한 청년으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지식인으로 대접해 줬던 것입니다. 그건 구별도, 차별도 아닌 그저 대우였고 대접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르디외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대학원에 막 들어갔을 때쯤, 실질적인 대학 진학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웠습니다. 대학의 수준이 문제였지 입학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 대학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교회나 동네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동년배를 만날 때도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교회에서 묘한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주로 활동했던 대전과 평택의 몇몇 교회에서는 청년부와 대학부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서울에서 더 일찍 일어났죠. 청년부와 대학부를 나눈다는 건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같은 또래의 사람들이 대학 진학의 유무에 따라 다른 범주로 분류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함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물론 청년부에선 그 나이의 폭을 훨씬 넓게 설정해서 미혼 남녀들은 교회에 붙들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 남녀들의 사교의 장 역할을 하기도 했죠. 이런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몇몇 교회에선 잡음이 발생했습니다. 두 무리에 차별적 대우가 있지는 않았지만 대학 진학 여부에 따라 동년배의 청춘남녀를 갈라 치기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됐죠. 이런 잡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이런 구분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던 삼십 대 중반까지, 역시 격차나 구별을 크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피부로 와닿은 순간

제가 대학을 나온 사람, 또는 그 이상을 공부한 사람과 대학의 문턱도 가보지 못한 사람과의 격차를, 그것도 다양한 분야에서의 격차를 느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아내의 사촌 중, 고등학교 졸업 후 대기업의 생산직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처사촌이 여러모로 맘에 들어서 종종 부부 동반으로 만나서 여행도 가고 식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처사촌 동생이 저를 상당히 어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건 단순히 손위 사람을 대할 때의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평소에 만날 일 없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 뭘 해야 하는지, 그 사람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그런 종류의 어려움이었습니다. 그와 저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경험의 폭과 낙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십여 년 가까이 협업을 해 온 울산의 S 감독과 같은 격차를 느꼈습니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분명 저보다 물리적 자본은 많았지만 문화적, 지적 자본은 적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든 여행을 가면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완전히 상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지역의 펜션을 예약해 가면 짐을 풀고 물놀이를 하고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셨습니다. 반면 저희 집 같은 경우는 앞서 말했든 주변을 산책하거나 가까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았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아이 교육을 잘못했다고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현장에 뛰어들어서 일을 익혔기에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할 기회가 없었고, 그렇기에 자녀에게도 그런 체험을 안내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로가 편한 이유

전 최근, 딸의 학교생활과 영재교육원에서의 경험을 전해 들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어떤 차이, 혹은 격차가 같은 나이, 같은 학년,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발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아닌 같은 지역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중학교 안에서도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면, 이것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소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또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이 차이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이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반 아이들은 영재 활동을 하는 아이들을 자기와는 다른 수준의 아이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영재에 모인 아이들 중엔 학교에서는 말이 통하는 애가 없어서 답답했는데 여기 오면 말이 통해서 좋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공부 이야기, 진로 이야기, 조금은 속 깊은 고민은 말이 통하는 아이들하고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문해력이나 공부 실력으로 아이들끼리 차별하고 구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는 아이들끼리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더 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죠. 달마다 짝을 바꾸고 자리의 앞뒤를 바꿔도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격차 현상

한 사람이 생산한 텍스트와 메시지가 다른 이에게 해석되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입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사용하는 단어의 양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 언어생활은 물론이고 문화생활과 학교생활, 진학학교의 수준, 직업 선택에서의 자유도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성인의 절반 이상이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읽기 능력을 갖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덴마크는 문해력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책에 부과했던 세금을 전면 철회를 예고했을 정도죠.


한국이 당면한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보도에 의하면 성인의 3.3%에 해당하는 약 146만 명이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의 기초 문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령이 높고 소득이 낮을수록 문해력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죠. 어쩌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배경에도 이런 문해력 격차가 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상대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지면 당연하게도 소통의 노력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또 제가 피부로 느끼는 것보다 이 격차 현상은 더 심화되고 고착화 됐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EBS에서는 <당신의 문해력>과 <책맹인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이 프로그램의 PD는 <문해력 격차>라는 책을 썼을 정도니까요. 책에서 나왔듯이, 문해력 격차는 그야말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투입 자본의 유무뿐만 아니라 애초에 갖고 있는 문해력이라는 자산 여부에 따라서 더 높은 문해력으로 도약할 수 있느냐가 결정지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문해력에도 종잣돈, 시드 머니처럼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전 다음 편에서 지역에서 소위 좋은 고등학교를 가고 좋은 대학교를 보내는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 그것을 측정하는 학원들의 설문과 질문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이런 학원들은 학생의 실력, 부모의 경제력과 함께 학생의 공부를 대하는 태도도 면밀히 살핍니다. 앞으로도 공부에 대한 남다른 마음가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소위 명문대학을 갈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전 그 설문 내용을 보고 솔직히 약간 놀랐습니다. 앞서 말한 스위치와 동력의 힘을 새삼 발견했으며 부모의 역할, 그 공통점 또한 발견했습니다. 격차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깊이 뿌리내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추석 연휴의 시작 전, 딸은 학교 도서관에서 카뮈의 <페스트>를 대출해 왔습니다. 그 위에 책은 종종 펼쳐 보던 외국의 추리소설이고, 그 위의 두 권 중 하나인 유시민 선생님의 책은 제가 추천, 궤도의 책은 딸의 팬심으로 산 것이죠. 책갈피를 보니, 연휴 기간 동안 아래의 두 권을 읽을 계획인 것 같습니다.


제가 <페스트>를 처음 읽은 건 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만약 딸이 저걸 완독 한다면 저보다 5,6년은 빨리 읽는 셈이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잘 건져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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