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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이서 Dec 26. 2021

집 한구석 읽기 터

의외성이 주는 공간의 가치


우리 집에는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구석구석에 책 읽는 곳들이 있다.. 침대 곁 c-table, 내방 작은 책상, 주방의 식탁, 거실의 안마되는 안락의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화장실. 곳곳에 내가 평상시 읽고 있는 책들이 있다. 때로 그곳의 책들은 그때그때 갈리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곳에 갈 때마다 한 페이지씩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 책이 되어 몇 년에 걸쳐 한 곳에 자리잡기도 한다.


책 읽기에 최적인 공간은 어디일까? 우선 떠오는 곳은 당연히 도서관, 책상일 것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들어오는 공간은 책 읽기를 위해 마련된 전용공간이나 책상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침대에 누워서 보고,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보고, 그리고 화장실 볼일을 보고 할 때 그 내용이 더 깊이 다가온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치 활자가 커지듯이 훅 들어오는 공간은 다른 기능을 위해 마련되었던 공간이다. 의외적 공간에서 책의 내용이 확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가 집에 책상이 있고, 사무실에 내 자리가 있음에도 집 밖의 커피숍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더 잘되는 것과 같다. 이런 의외성의 공간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장소가 될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수긍이 쉽다. 책상보다는 밥상이 책 읽기에 최적이라는.


얼마 전 나는 문뜩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집 한구석 읽기 터를 한 곳 발견하였다. 이곳은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저 지나가는 공간이다. 이곳은 지나가는 행위 외에 다른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지나갈 수 있게 하는 복도의 기능적 공간이자 액자가 걸린 시각적 공간이었다. 그렇게 이 집에 18년을 살고 있는 동안 이곳은 그렇게만 쓰였다. 그러나 어느 날 캄캄한 새벽 이곳의 불을 켜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발견되었다. 그저 지나가는 공간인데 공간의 크기와 자주 켜지 않는 스폿 조명이 이리 쓰임새가 좋을 줄이야. 유레카! 정말 집중되는 깔끔한 공간이었다.


나는 이곳을 한구석 읽기 터로 짱박으러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가져다는 의자에 앉아 방글방글 더 친근해진 활자를 읽다가  “왜 이런 의외의 공간이 책 읽기에 최적인 곳이 될까?”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곳들은 보통 비워져 있는 공간이다. 그곳의 단순기능을 위해서 평상시 정돈되어 있고 비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 공간에 가면 오로지 다른 잡동사니들이 없어 나의 눈과 책뿐일 수 있다.


책상과 밥상을 생각해보자. 책상에는 보통 책들이 펼쳐있기 쉽다. 물론 책을 쭉 책꽂이에 꽂아두고 책상은 늘 말끔한 최대 깔끔형 인간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집의 책상, 사무실의 책상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 밥상을 볼까? 밥상은 밥 먹기 위해서 치워져 있어야 새로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러니 보통 밥상은 치우기 마련이다. 비워져 있는 상태가 디폴트 값이다. 여기에 한 권의 책을 펼쳐 놓았다 상상해보라 오로지 나와 책의 만남이 되는 것이다.


책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활자 중독일 수 있다. 그런 활자 중독자들도 계속해서 한 곳에서 글을 읽다 보면 글의 내용이 흩어진다. 그럴 때 읽는 공간을 바꾸면, 사라져 간 활자들이 달리 보인다. 그렇게 새롭게 만날 수 있다. 공간에 따라서.


또 하나 이런 의외성의 공간들이 좋은 점은 ‘시간의 멈춤’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일상은 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하다못해 밥을 먹는 일도 잠을 자는 일조차도 그것을 음미하거나 즐기기 보다 배가고프니깐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하니깐 하는 생존의 당위가 더 많이 차지한다. 우리의 주변은 연속적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위한 기능적 공간으로 가득차있다. 우리는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생산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공간의 구획안에 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이곳은 흐르는 시간에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하는 속도의 공간들이다. 이러다 만나는 의외의 공간에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잠시 몸을 쉬기도 하고, 생각을 쉬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몸안에 숨어있던 감각이 드러난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 자신의 순수한 감각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 의외성의 공간에서 내가 보는 책의 활자가 더 커져 보이고, 부유하던 생각의 고리가 엮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길지않으며 그래서 더 짧고 강렬하게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장소가 된다.


근대의 모더니즘은 각 공간을 기능별로 분류하였다. 이곳은 잠을 자는 곳이고, 저곳은 음식을 만드는 곳, 밥을 먹는 곳, 공부하는 곳. 기능별 공간의 분리는 분명 효율적이긴 하다. 그러나 일상은 그렇게 딱 나뉘지 않는다. 더군다나 창조의 순간이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서를 건드리는 순간은 기능적인 곳에서 오지 않는다. 공간의 기능을 무시하라는 것이냐? 하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일차적 기능성이라고 일컫는다. 공간의 일차적인 기능성 위에 정서적 차원은 발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공간의 다른 차원은 발견하는 것이다. 건축가가 정말 신경을 쓰는 것은 이 차원이 아닐까 한다. 발견의 기쁨을 줄 수 있는 공간말이다. 잘 만들어진 공간과 건축에는 숨어있는 이러한 공간들이 있다.


잘 예측된 공간이 내 삶의 주변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꼭 건축가가 아니어도 이 발견은 가능하다. 오늘 지금 자신의 집의 주변을 살펴보라.내 눈에 반짝하고 들어오는 공간이 있을 수 있다. 나만을 위한 순간을 기쁘게 할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를 찾아보면 어떨까?


#공간의 발견  #한구석읽기터  #공간의다른차원은멀지않다  #건축가전이서 #발견의기쁨


*발견해 보셔요. 두개의 사진에서 달라진 곳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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