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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Nov 01. 2023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다

성경에는 학벌과 재력을 겸비한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뿐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더불어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그에게 있었다. 이미 거리에는 메시아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고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다니며 만나고 있었다. 그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메시아 만나기를 고대하며 나름 선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니고데모는 그만하면 충분히 메시아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초라한 나사렛 선생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그의 지위와 높은 학식, 재능, 체면이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니고데모가 메시아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의 선택을 흔들어 놓았으며 의지를 한없이 기어들어 가게 했다. 그는 변명하면서 솟아오르는 용기를 계속해서 구겨 넣었다. 우선, 그가 속한 엘리트 그룹에서 그를 조롱하고 비난할 것이었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선생으로서의 자기 삶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오히려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을것이라는 합당한 명분의 변명이 그를 짓눌렀다.

그가 변명할 여지는 차고 넘쳤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니고데모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니고데모는 자신의 업적과 태생, 가진 것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루어 온 모든 업적을 이 나사렛 선생에게 인정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의 높은 지위와 학벌이 초라한 나사렛 선생과의 토론 중에 높여지기를 바랐으며 그동안 존경받았던 봉사와 관대함이 높이 평가받기를 기대했다. 훌륭한 나사렛 선생을 만남으로 그가 가진 스펙이 더욱 빛나기를 바랐다. 그런데…일이 났다.

그동안 그의 눈을 가리던 우월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늘나라는 너무나 깨끗하여 그로서도 감히 들어갈 수 없을 듯했고 그는 그 현실에 눈을 떴다. 게다가 그 나사렛 선생은 거듭남이라는 키워드로 알 수 없는 이론을 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금 흥분했다. 본인의 시나리오와 맞지 않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을 믿는 마음을 버려야 했다. 그동안 애쓰며 쌓아 온 업적을 내려놓아야 했다. 마음의 냇물을 맑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마음의 샘을 청소해야 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완벽했던 그의 행위를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상실감이 그를 더욱더 고통으로 몰아갔다. 

니고데모가 여기서 물러났다면 그는 아마도 부자 법관처럼 되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신비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니고데모를 기다려 주셨다. 그리고 바람과 같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 주셨다. 

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하나님께로 젖어 드는 중이었다. 그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그분은 성령을 통해 니고데모를 꿰뚫고 계셨으며 니고데모를 교훈하시는 그 시간, 성령의 바람이 니고데모에게 불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싫어서 그동안 선하고 인정받는 일을 위해 전심전력하며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나사렛 선생 앞에 서니 부끄러운 자신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적으로 무지했던 자신의 모습과 한때의 자만심이 드러나도 수치스럽거나 흥분되지 않았다. 

자신의 자랑이 과오로 비칠 때 그는 나사렛 선생의 교훈을 깨닫고 드디어 구주께로 이끌렸다. 사람들 앞에서 의롭고 존경받았던 그의 삶이었지만 그리스도 앞에서는 마음이 부정하고 생애가 거룩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바람과 같은 성령의 부드러운 임재를 받아들이고 겸손해졌던 탓에 예수님은 그에게 구속의 경륜과 당신의 사명에 대한 체계적인 교훈을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그 밤에 일러 주신다. 그리고 그는 온전히 깨닫는다. 어쩌면 그의 높은 학식은 이때를 위함이 아니었을까?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니다.


갑자기 성령께서 더욱 직접적인 호소를 하실 때에 그 영혼은 기쁘게 자신을 예수께 바친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성령의 오랜 구애 곧 꾸준하고도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서 호소하신 결과이다 (DA, 172).


화내고 흥분하고 참지 못했던 자신이 어느 순간 달라져 예전 같지 않다면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주셨다는 것을, 내가 깨닫기까지 인내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 밤, 고적한 산에서 한 사람의 청중에게 하신 그 말씀은 오늘 나에게도 적용된다. 그 밤의 경험은 니고데모를 사로잡았고 그의 사역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진리를 묻어 두었으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훗날, 담대히 나서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선교 자금으로 드릴 수 있었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그 밤부터 시작되었다.

대기만성이었던 니고데모의 신앙처럼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니고데모에게 불었던 성령의 바람이 내게 스쳐 늘 한결같이 변함없는 나의 신앙도 가랑비에 옷 젖듯 구주께로 스며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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