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새벽에 은혜가 내리고
은혜 위에 은혜러
당신은 이미 성공하였는가?
아니면 성공을 위하여 무한 질주 중인가?
그런데 자신의 형편이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환경인가?
어딘가에 혹은 무엇인가에 발목을 잡혀 있지는 않은가?
그 발목을 잡은 것이 혹 돈은 아닌가? 아니면 가족, 아니면 학벌이나 능력?
이쯤 되면 성공은 나와는 멀어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된다.
그동안 아무리 잘했던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 없어지고
꿈이라고 얘기하기도 쑥스러운 보잘것없던 희망은 어느새 절망이 되어 있다.
시험과 고독과 고난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고만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베드로가 그랬다.
자신의 동료이자 의지의 대상이었던 침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해 있고,
거듭되는 전도의 실패로 보아 자신과 동료들의 운명도 암담했다.
인생을 걸었던 구주 예수님은 제사장과 랍비의 표적이 되어 집중 공격을 받으신다.
베드로 인생 최대의 절망이었다. 성공?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 곁에서 잠시 떠나기로 한다.
세상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헛된 기대를 안고도
헛된 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처럼
인생의 어느 중요한 기로에서
헛된 현실을 알아버렸다면
그때 우리는 주님을 떠날 것인가?
예수께서 그토록 알아듣기 쉽게 진리를 설파하셨어도 제자들은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여
이 땅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생을 바쳤었다.
물론 가끔 깨달음도 있었고 뉘우침과 회개도 있긴 했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쭉정이는 알곡과 분리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허영심이 많고 독선적이어서 견책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겸비의 생애를 감수하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였으므로 대부분이 예수님에게서 떠나갔다.”(DA, 392)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았을 때 곁을 좇던 많은 이들이 예수를 떠나갔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런데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는 제대로 알았던 걸까?
베드로는 여러 번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었다.
그분의 하나님 다우심을 가장 측근에서 지켜보았었다.
육신으로만 함께 동행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영혼의 닻으로 여겼던 것이다.
보리떡의 이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말씀과 생명유지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셨건만
보리떡만 받아먹고 생명의 떡인 말씀으로 매일 영혼을 샤워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 깨닫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갔다.
그나마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던 고기잡이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고 빈 그물만 바라본다.
그렇게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간에 베드로의 배를 빌리셨다.
이제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를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려 하신다.
그물을 던지라 신다.
거기는 밤새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던 곳이었다.
예수님이 모르실리 없을 텐데… 베드로는 밤새 그곳에 그물을 던졌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밤새 허탕을 쳤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시 던져 볼게요 한다.
그랬더니 대박사건이 일어났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힌 것이다. 혼자서는 끓어 올릴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압도되었다.
그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기적을 보여주셔서
그분께 엎드려 감격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과 그 상태를 헤아려 주시고 가장 낙심 중에 있을 때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신 세심한 예수님의 배려와 하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낙담과 절망 중에 있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분의 제자로 활동했지만
진정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이 순간에 일어났다.
“이사야에게 하늘의 기별이 위탁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본 후에 있은 일이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에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아를 버리고 하늘의 능력에 의지한 후에 있은 일이었다.” (DA, 248)
그 순간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정한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사업이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의심하며 불평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에 계시고 그분의 지도 아래서 일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능력의 증거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DA, 249)
그 새벽, 예수님께 압도당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그 순간,
생명의 시여자이신 분께서 우리를 향하여 조용히 보내시는 관심에 압도당하지 않을 자 있을까?
이것이 자신이 한없이 작아졌을 때 깨닫게 되는 축복이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일 1:2; 요 1:16)
예수님 덕분에 인생 꿀팁을 알아가는 것,
이럴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의 표현이 바로
“은혜 위에 은혜러라”이다.
이것을 아는 특권, 이것을 말할 수 있는 축복, 이것을 누리는 영광이 우리의 것이니 곧, 은혜 위에 은혜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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