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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dal Apr 11. 2021

아무튼 가출 (1)

기억의 입자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곳에 묻어 있음을 종종 느낀다. 유난히 하늘이 파란 날, 불어오는 바람에 과거의 어느 날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심지어 꼬깃한 종이 영수증에도 나의 지난 하루가, 그 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OO마트.

2020년 12월 24일,  

소주

냉동 크림새우

  

크리스마스이브에 소주, 뭔가 조금 스산하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저 당시 집안에 유난히 큰 소리가 오고 갈 일이 많았다. 가정사는 익명의 세계에서도 상세히 밝히긴 어려운 주제임으로, 그저 구성원 사이에 불만과 화가 넘쳐나는 시점 정도로 언급하겠다.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에 한 번씩 발발하는 전쟁에 집순이인 나조차도 집안에 머무는 것이 버거워졌다.


하루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 가방 하나 덜렁 메고 나온 시각이 저녁 8시였다.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집을 나오게 되면 가장 편하게 발길이 닿는 곳은 대형마트였다. 하지만 거의 모든 가게가 한창 9시로 영업을 제한하던 때라 나는 얼마 안 가 길 위에 놓이게 되었다. 도심에서 거의 처음 느껴보는 그 날 들의 고요함을 잊을 수 없다. 아직 영업 중인 제과점에 들어가 대충 빵을 고르는 척해봐도 10분 이상 머물기는 쉽지 않았다. 유난히 춥고 어두웠던 지난 겨울에 공원을 산책할 용기는 나지 않았고, 결국 아파트 단지를 조금 돌다 몇 시간 만에 가출이(?) 종료되었다.


대충 이런 패턴이 몇 번씩 반복되던 시점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다고 해서 내게 특별한 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12월 24일에도 여전히 마트와 동네 몇 바퀴의 동일한 코스였고, 그저 맛있게 보였던 크림새우와 아마도 취하고 싶다는 생각에 맥주 대신 소주를 구입했을 것이다. 그 날의 씁쓸함을 굳이 마주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에 순식간에 재연되었다.  


작정하고 일기장을 열어보지 않더라도 곳곳에 나도 모르게 묻은 기억들이 피어오를 때, 그 화력은 더욱 강력하다. 같은

기억들이 긴 시간 제 자리를 돌고 도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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