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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춤을 추게 된 이유


인정중독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인정중독에 빠져있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나의 부모는 아름답고 훌륭했다. 청순미모의 전교 1등 어머니와 S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한 조각미남 아버지는 서로를 첫사랑으로 만나 결혼했다.


  그들 사이 첫째 딸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에 부모의 외모를 닮지 않았었다고 한다. 하필 할아버지를 빼다 박았던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어딘가 JYP를 닮은 핵인싸로 음주가무에 능했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눈빛이 강하고 다리가 긴 호감형 멋쟁이로 요즘 말로 하면 '힙한' 사람이었다. 리즈시절 심은하 뺨치게 이뻤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장인회유 스킬’로 색시 삼아 버린 어마무시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동네 맥가이버로 소문난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뚝딱뚝딱 고쳤다. ‘오도바이’를 타고 ‘총포사’를 운영하며 ‘꿩 사냥’을 다니셨다. 웬만한 신문물이라면 다 가진 트렌드 세터로 ‘영등포 GD’ 같은 핫한 사나이였다. 나는 그의 유전자를 잔뜩 물려받은 첫 번째 손녀로 태어난 것이다.


  오뚝한 코에 쌍꺼풀진 눈을 가진 부모님과 다르게 할아버지를 닮아 다소 동그란 콧구멍과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얼평대상 1호였다.



     ‘아이고 넌 왜 하필 할아버지를 닮았냐…’


     ‘커서 쌍꺼풀은 꼭 해야겠네!’



  어린것이 뭘 알겠나 싶어 어른들이 농처럼 뱉은 말들은 마음 한구석에 상처로 자리 잡았다. 그 때문인지 어린것은 어느 순간부터 부모 같은 훌륭함을 갖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외모는 틀린 것 같으니 좋은 성적을 얻어야만 했다. 다행히 어린것은 부모를 닮아 꽤나 총명했다. 국민학교 시절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미술, 음악에도 소질을 보여 몇 번의 피아노 콩클도 나갔다. 공주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잘난 부모덕에 꽤 공주처럼 살았다. 내 방이 있었고, 내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고, 레이스 원피스도, 빨간 구두도 있었다.




달동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불운이 우리 집을 덮쳤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뒤이어 설상가상의 사건들이 가정을 할퀴었고 우리 집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 났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동생과 나는 조부모님 손에 맡겨졌다. 조부모님은 손자들을 사랑하셨겠지만, 삶이 너무 빡빡했다. 그 때문에 집안엔 늘 고성과 폭력이 난무했다.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진 나는 점점 반항적으로 변모했다. 성적은 하락했고, 말수는 줄었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머리를 단발로 자르라고 하자 쇼커트로 잘라 버렸다. 키는 자라고 살은 붙지 않았다.


 조부모의 집은 달동네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 끝 집이었다. 집 바로 뒤편으로 낭떠러지 같은 죽은 공터가 있었고, 오래된 철로 위로 더러운 기차가 지나갔다. 소음과 매연으로 가득한 환경이었다. 조부모의 집은 낡고 좁은 1층짜리 주택으로 급하게 대충 지은 흔적들이 집 안팎에 역력했다. 좁은 공간을 세 개의 방과 부엌으로 꾸역꾸역 나누어 놓았는데 조부모 부부, 큰고모 부부와 자식 셋, 작은고모, 나와 남동생이 꾸역꾸역 살고 있었다. 변기는 하나였다. 한겨울에 변기에 앉으면 엉덩이가 얼 것 같이 추웠지만 다행히 푸세식은 아니었다. 문제는 씻는 곳이었다. 앞뒤로 문이 벌컥벌컥 열리는 ‘광’에서 ‘다라이’에 받은 찬물을 바가지로 퍼내어 씻어야 했다. 사춘기 소녀가 마음 놓고 샤워할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 목욕탕이나 보내주고, 끼니 꼬박꼬박 얻어먹으면 다행인 삶이었다. 다들 먹고살기 바빴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방치된 사춘기 소녀는 꼬질꼬질했고 점점 혼자가 되었다. 방구석에 처박혀 부러진 안테나 대신 젓가락을 꼽은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여성으로서 성장할 수 있게 케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리가 터진 어느 날도 동네 구멍가게에서 쭈뼛거리며 싸구려 생리대를 사서 눈치껏 착용한 것이 다였다. 누구의 축하도 없었다.


 작은 여자아이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열네 살의 한 해를 보냈다. 하루빨리 세상에 인정받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춤추고 노래하면

  중2병이 한창이던 무용시간의 일이다. 선생님은 창작무용 숙제를 내주었고, 장르는 자유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영등포 GD’의 강력한 유전자 하나가 내게 발현되기 시작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믹싱하고, 눈썰미로 안무를 카피했다. 미처 캐치하지 못한 애매한 동작은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준비한 무용숙제를 발표한 날, 나는 우리 반 스타가 되었다.


  갑자기 친구가 늘어났고 혼자였던 나는 무리에 섞이게 되었다. 며칠 후 난생처음 노래방이란 곳에 갔다. 나는 당시에 열혈 라디오 청취자였고, ‘더 클래식’의 테이프는 늘어지기 직전이었다. 천 번, 아니 만 번은 들었을 것 같은 ‘마법의 성’이 노래방 책자에 있었다. 떨리는 맘으로 번호를 누르고 마이크를 잡았다.



   ‘펼쳐질 세…상…이……’



노래가 최고음에 달하자 정적이 흘렀다. 세상에 나와 노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박자에 맞추어 마지막 부분을 불렀다.



    ‘너무나 소중해….. 함께 있…. 다….면….’


    ‘꺄아아아아아아’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고 심장은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뛰었다.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나의 노래를 극찬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순수함과 열정이 담긴 리액션은 나를 한 번 더 전율하게 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춤을 추고, 노래하면 아이들은 나를 기꺼이 사랑해 주었다. 열심히 안무를 따고, 열심히 노래방에 갔다. 학교에서는 걸핏하면 불려 나가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동성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찾아와 러브레터와 초코우유를 조공했다. 나는 중고교 시절 내내 춤과 노래에 미쳐있었고 교내 최고의 인기를 유지했다.



그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인정중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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