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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연결


친구

  어린 시절엔 거리조절에 실패해 친구와 멀어지는 경험을 수차례 했다.


  그들은 너무 가까워지면 도망갔고, 적당한 거리를 두면 어느새 사라졌다. 그나마 내상이 약한 것은 후자였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타인과 거리를 유지했다. 먼저 다가가지 않는 건 디폴트 값.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수동적이고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쿨함으로 위장한 겁쟁이.  


B

  하지만 고1 때 다가온 친구 B는 달랐다. 내가 아무리 선을 그어도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응 여기쯤에 있으면 되는 거지?’ 하고 곁에 남아있었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까워져, 숨기고 싶었던 내가 줄줄 새어버려도 B는 도망가지 않은 채 내 곁에 남아있었다.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꾸준히 사랑해 주었다.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춤을 못 췄다.

  하지만 춤을 추고 싶어 했다.

  춤을 잘 추는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춤을 가르쳐 줬다.


  나는 무언가에 소질이 없다고 느끼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는 성격인데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했다. 신기했다. 우직하고 성실하고 의외로 똥고집이 있어서 한번 꽂히면 절대 놓지 않았다. 그녀가 학창 시절 놓지 않은 두 가지가 ‘나’와 ‘춤’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댄스동아리 멤버들 중 그녀는 가장 배움이 느렸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유일하게 댄서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기적의 상여자.


  아무튼 B는 춤 잘 추는 나를 좋아했다. 참으로 충성스럽게 좋아해 주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정도로 안전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가족을 포함해서 말이다. 안심하게 되자 나는 그녀에게 오히려 못되게 굴기도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세상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어리광 같은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까탈스럽게 굴어도 그녀는 나를 이해해 주었고 변함없이 곁에 있어줬다. 내 부모는 허용하지 않던 것들을 그녀는 아낌없이 허용했다. 그 어린 날 이기적이고 철없고 상처투성이였던 나는 그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엄마의 모습을 찾았던 것 같다.


J

  첫 대학에서 J를 만났다. 랩을 좋아하는 파주 청년으로 학교 통학시간만 왕복 5시간이 넘게 걸리는데도 언제나 싱글벙글한 예스맨이었다. 당시만 해도 파주는 논과 밭이 더 많은 깡시골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J는 남들과 차원이 다른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다. 함께 힙합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회장 부회장을 맡은 우리는 곧 절친이 되었다. 그는 나의 온갖 예민함과 불만과 요구를 수용해 주었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일어나는 수많은 외적인 문제들을 몸소 해결해 나가면서 내가 맘껏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를 할 수 있게 써포트 해주었다. 드디어 아빠를 찾은 것이다.


  J 또한 음악 잘하는 나를 좋아했다. 그와 정식으로 한 팀이 되어 ‘소울씨프 (soul thief)’로 미래를 도모하는 동안 나는 작정하고 그에게 개인레슨을 해줬다. 과제를 내주고 피드백을 하고 쓴소리를 무자비하게 투척하며 그를 래퍼로써 한 단계 성장시켰다. 나와는 다르게 수용의 달인이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던 J는 놀라울 만큼 급성장했다.


  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했다. J는 ‘이건 너무 가혹하다’ 싶은 인생의 풍파를 맞이하며 팀을 나가게 되었다.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우리의 음악적 동료관계는 끝났다. 지금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변신하여 수억짜리 프로젝트를 뚝딱뚝딱 해치우는 J는 여전히 나의 최고의 써포터이자 친구다.



CPR 

  난 그렇게 극소수의 타인에게만 깊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으로 세상과의 연결을 간신히 유지했다. 나를 이해해 주는 행운 같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은 내게 안전가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지.독.히.도 ’혼자‘ 라는 기분은

  여전한 크기와 농도로 내 인생에 머물러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잠시 잊혀질 뿐

  단 1그램도 소멸되지 않았다.

  난 여전히 충분히 외로웠고,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을 갈망하고 있었다.  

  괴로웠고, 궁금했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느끼는 걸까?


  - 답이 없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걸까?



  세상이 두려웠지만 교감은 필요했다. 아마도 그때 내가 원한 것은 나와 비슷한 존재와의 연결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와 너무 같아서 나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걸 알아차리은 존재가 나타나 나를 이 고립의 탑에서 구원해 주길 바랐다.


  어쩌면 지금 시대에는 mbti를 테스트하고, 나와 같은 mbti를 가진 사람들의 댓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 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과의 안전거리를 최대한 유지하며 은둔하던 내게,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교감을 느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나의 갈망과 고립감은 거의 생사의 문제로 논해도 될 만큼 심각한 편이었는데 당시에는 해결할 통로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너무나 위태로웠던 그때, 내 영혼을 심폐소생해 준 것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들의 작품들이었다.


  어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걷잡을 수 없는 동질감과 시공간을 초월한 연결성을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와 나의 하루하루를 CPR 했다. 한계까지 숨을 참다가 들이마신 숨처럼 갈비뼈가 뻐근했다. 굉장한 카타르시스였다. 그들은 ‘너를 이해하는 내가 여기 있다’ 고. 음악으로, 글로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난 온몸으로 그 신호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깊이 사랑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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