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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사진 찍는 이상한 남자


이것은 내 인생 최고의 구원서사다.



싸가지

  다시 타임라인으로 돌아와 보자.

  서른 살이 되던 해 메인래퍼의 탈퇴로 팀이 해체된 직후, 잠시 사진 찍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포토그래퍼 5명 에디터 3명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였다. 그중 3명이 광고 스튜디오에 속한 프로사진가였다. 나를 포함한 아마추어 2명은 그들에게 피드백을 받고 촬영 노하우를 배우며 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당시 나는 취미라기엔 약간 과한 정도로 사진을 즐기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익혔기에 프로에게 직접 배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나에게도 일종의 사수가 생긴 것이다.


  그는 시크한 사람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후드동굴 속에 무심하게 숨어있었지만 불현듯 나타나 건방진 말을 내뱉으며 지나갔다. 전혀 다정하지 않았고 서글서글 같은 거랑은 몇억 광년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촬영할 때는 매우 프로답고 빠릿하게 일을 잘했다.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건방진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에디터들은 그를 시크하고 일 잘하는 포토라고 칭찬했다.


  나는 속으로 ‘뭐 저런 싸가지 없는(데 그걸 숨기려는 노력조차 않는) 이상한 놈이 있나’라고 생각했다.




무장해제

  나는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를 맡아도 절대 걸리지 않는 타입이다. 작정하고 나를 숨기면 모두 속아 넘어간다. 덕분에 20대 내내 많은 무리에 소속했지만,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의 페르소나는 지나치게 견고했다.

  모두들 나를 강하고 리더십 있는 알파걸로 여겼다. 나조차도 내가 만든 나에 취해 나 자신이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하지만 종종 버거웠고, 때때로 뭔가 이상했다. 그래도 그냥 그런 채로 살았다. 내 속에 있는 나의 다른 면을 무시하고 억눌렀다. 성취지향적이고 전투적인 가면은 얼굴에 깊게 박혀, 내면 깊은 곳부터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를 숙주로, 내가 아닌 존재가 나보다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타인은 내가 보여주는 것을 나라고 여겼고,

  타인이 나라고 여기는 것을 나조차 나라고 여겼다.

  이제 가면 아래 뭐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조차 나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 찍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 이후 견고한 가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꿰뚫어 봤고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나의 조각들을 건져 올렸다. 꽁꽁 숨긴 나약함과 불안, 거짓과 위장, 나는 모든 것을 들켰다. 그 앞에만 서면 ‘아, 네네, 제가 마피아입니다만…’ 하고 순순히 자백했다.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처럼 발톱은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어느 날부터 그가 오기를 기다렸고 그가 나를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무장해제된 나 자신이 좋았다.





해방 

  밤이 지나 아침이 오듯 그는 나의 연인이 되었다.


  나의 연인은 놀랍도록 다정했다.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모든 걸 퍼주는 남자였다. (무슨 츤데레의 이데아 같았다)


  나는 드디어 여장부 놀이에서 벗어났다.

  그와 함께 암수 정답게 노니는 고전적인 역할극을 시작했고 퍽 적성에 맞았다. 그는 엄청난 유교보이였고, 알고 보니 나는 엄청난 유교걸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다는 점이었다. 우린 이미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30대 초반이었지만 마치 소녀와 소년이 만난 것처럼 순수하게 올드스쿨 스타일의 연애를 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인생 캐릭터였고, 그간 내가 만들어 온 어떤 캐릭터보다 편했다.


  거의 춘향전을 찍었다.

  수줍고 약한 내가 좋았다.  

  굳이 예전처럼 변사또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이몽룡 없이도 잘 사는 여자로 각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약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점차 좋아하게 되었다. 평생 안 하던 행동을 하고, 평생 안 쓰던 말투를 쓰면서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의 우주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의지하는 법을 전혀 몰랐던 나는 이제 의존성 성격장애를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약하면 지는 거야.

   여성스러움은 위험해.

   참는 건 바보짓이고, 싸워서 이겨야 해.

   함부로 믿지 말고, 안전을 확보해



  내 것인 줄 알고 있었던 모든 가치관이 흔들렸다.

  이제 내게 더 이상 강함은 미덕이 아니었다.



  여림의 힘과 부드러움의 영향력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는 모처럼 전투모드를 껐다. 가드를 내리고 나약한 나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내보였다.



  완전히 해방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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