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서울 위시리스트

쿨타임에 대처하는 방식

by 은도

카페와 술집이 내 생활의 큰 두 축이었다는 사실을 완주에 오고나서 알았다. 완주에서는 그 둘 모두가 몹시 빈약해서 친구들한테 가끔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다 서울 일정이 잡혔던 날, 친구에게 곧장 연락해 1차는 이자카야, 2차는 한식 주점, 3차는 칵테일 바로 이어지는 술 코스를 짜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1일 2카페 투어를 할 것이라고도. 친구는 서울행을 앞두고 광란의 위시리스트를 짜는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카페는 내 생활에서 가장 잦은 지출을 차지했고, 술집은 가장 큰 지출을 차지했다. (식비 제외) 요즘 마음속에선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진하고 고소한 플랫화이트를 스콘이나 치즈 케이크와 함께 먹고 싶다. 사장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카페에서 느긋히 시간을 보내고 싶다. 컨셉이 확고한 카페의 분위기를 즐기며 책을 읽고 일기를 끄적이다 때때로 고개를 돌려 사람 구경을 하고 싶다. 이자카야에 가고 싶다. 동네 친구를 불러내 설렁설렁 걸어가 막 구워낸 꼬치를 먹으며 생맥주를 들이켜고 싶다. 사람들 목소리가 겹쳐 웅성이는 작은 술집에서 두툼한 숙성사시미를 먹으며 사케를 마시고 싶다. 취기가 오르면 근처 술집으로 걸어가 튀김 안주와 하이볼로 입가심을 하고 싶다. 혹은 달콤하고 쓴 칵테일을 2잔쯤 홀짝이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그렇게 알딸딸해지면 들뜬 기분으로 휘청휘청 집으로 걷고 싶다.


완주는 마치 전주의 수도권 같은 느낌이라 도시 도파민이 필요할 때에는 전주에 나가면 된다. 전주에 나가면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나 컨셉이 확고한 카페들이 많아 때때로 전주 나들이를 한다. 하지만 술집은 타협이 불가능하다.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집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집에 술을 구비해놓고 하이볼과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기도 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걸 보면 영락없는 술꾼인가 보다. 술집에는 친구들과 분위기가 있는 걸!


...아무래도 도시 쿨타임이 찬 것 같다,


왜 그토록 카페와 술집을 좋아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는 일은 쏠쏠한 재미다. 카페는 집 밖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이며, 술집은 친구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장소였다. 카페에 가고 싶은 건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카페에 머무르고 싶다. 취향에 맞는 공간에서 커피와 함께 누리는 시간이 좋다. 내게 카페는 이상적인 취향의 공간이면서 현실로부터 잠시 분리되어 내멋대로 무용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라,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카페를 좋아했구나.


그러고 보면 술집은 특히나 그렇다. 카페가 분리된 취향의 시공간이라면 술집은 함께하는 취향의 시공간이다. 술은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럴 것이다. 친구들과 맛있는 안주를 나눠 먹으며 조금씩 취기와 호기가 오르는 시간이 좋다. 아하, 나는 술꾼이라기보다 술자리꾼이었구나.


더없이 만족스러운 완주 생활에서 딱 하나 빠져 있는 것을 고르자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이자카야와 술친구다. 정정해야겠다. 술집 쿨타임이 찬 것 같다고.


친구는 완주에서 생활하는 나를 보며 자신의 유학 시절을 떠오른다고 했다. 그때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지냈던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무척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너 역시 너에 대해 더 열심히 생각하고 알아차리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쉽게 누리던 것들이 어려워지면서 이곳의 불편함은 모두 질문이 되고 때로는 미션이 된다. 내 방식대로 불편함을 해석하고 해쳐 나갈 때 새삼 나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그래도 나를 정확하게 알아가는 일은 재미있다.


카페와 술집 지출 대신 요즘은 식재료 지출이 많다. 배달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되어 있어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길 때 스스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 최근엔 스콘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파는 곳이 없어서 베이킹 재료를 샀다. (그새 서울 스케쥴 잡혔다고 미뤄두고 있다.) 친구 기대가 베이킹이 취미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완주에 온 이후로는 소비욕이 줄었다. 물건을 사서 가지고 싶다는 욕구 대신,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자주 든다.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떠올리고, 망상도 자주 한다. 뜨개질을 배워 스웨터를 뚝딱 만들어 낼 나의 모습이나, 요리 기술을 단련해 술집 안주를 뚝딱 만들어 내는 나의 모습...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좀 흐뭇하고, 자급자족 능력을 키워낼 내가 기대된다.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 마시며 취하는 즐거움은 서울의 몫으로 남겨두고 완주에서는 삼삼하지만 확실한 손맛의 재미를 누려야지.


이건 내가 쿨타임에 대처하는 방식.





tempImageovWLFN.heic 이런 맥주를 보고 깔깔 대는 것이 술자리의 즐거움이지...(취해서 가능)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실험의 시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