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가 한창이다. 쉐어하우스 입주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미리 집을 빼버렸다.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 대충 이때쯤이면 완주에 가겠지, 싶어 서두른 탓이다. 다행히 서울에 있는 본가에 잠시 짐을 두기로 했다.
일주일에 걸쳐 살림을 조금씩 정리하고 조금씩 짐을 옮겼다. 이제 생활 필수품과 큰 가구만 남았다. 집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이것이 미니멀리즘을 실현한 집인가 봐.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미니멀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집이 영 황량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더는 내가 느껴지지 않아. 삐죽한 마음이 샘솟는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알려진 곤도 마리에는 이렇게 말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나는 그 말을 이렇게 고친다. 애틋하지 않으면 버려라.
살림살이를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허루투 있는 물건들이 하나도 없다. 나는 쓸모 없지만 기억하고 싶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전 애인이 선물해 준 다 먹은 영양제 통, 사후피임약의 빈 곽, 이제 멀어진 친구가 선물한 캔들. 그 물건들을 버린다면, 잃어버린 줄 모르는 채 서서히 그 기억들을 잃게 될 것 같았다. 그 물건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살려두고 싶었다. 그래서 버린 물건들을 글로 남겨 놓으려 한다.
전 애인이 쿠팡에서 시킨 영양제. 나는 필수품을 구매할 때 가격과 성능과 소재를 따지는 것을 어려워한다. 가전제품, 식료품, 세탁 세제나 고무장갑을 살 때에도 그렇다. 내가 영양제를 사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여성에게 어떤 영양소가 필요한지, 어떤 영양제가 가격 대비 좋고 안전한지 검색해 그 영양제를 골라주었다.
사후피임약의 빈 곽. 이것을 간직하게 된 계기는 무척이나 명확하다. 사후피임약을 먹었을 때 나의 외로움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서. 섹스는 함께 해도 피임은 나 혼자만의 몫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해 준 순간이었으니까. 약을 먹고 온 내게 순한 두부전골과 밥을 든든하게 먹였어도, 다음엔 같이 가자고 말했어도, 함께 산부인과에 동행했어도,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몫이었다. 경제적인 부담, 신체적인 부담, 심리적인 부담 모두.
이제 멀어진 친구가 선물한 캔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였으나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친구는 장문의 카톡과 선물, 케이크를 빼놓지 않고 챙겼다. 캔들은 작년 생일 선물이었다. 올해 생일, 그는 여느때보다 짧은 메시지만을 보냈다. 완주로 이주하려고 한다는 계획도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하면서 전했다. 친구는 대답했다. 완주 내려가기 전에 봐야지. 그 말이 좀 아팠다. 봐야지. 내려가기 전에 보자는 약속이 네겐 지나간 시간에 대한 숙제 같아 보여서.
버리기 어려운 물건들은 대개 한때 소중했던 사람들이 내게 선물한 물건들이었다. 좀처럼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물건 속에 담겨 있어서 마침내 버리기로 결심했어도 속이 쓰렸다. 예쁘다고 한 걸 기억하고 선물했던 천연석 목걸이와 반지. 집들이 선물로 받았던 분식집 그릇 세트. 폭신해서 안고 자고 베개로 쓰고 애인이 안고 자기도 했던 뚱한 표정의 토끼 인형.
쓸모 없지만 기억하고 싶은 물건들 외에도, 나는 예쁘면 일단 모아두는 물건들이, 쓰임이 있을 것 같아 모아두는 물건들이 많다. 친구에게서 받은 선물 포장지나 도톰하고 단정한 종이 봉투나 작은 박스, 포장용 리본끈, 인터넷 쇼핑몰에서 받은 지퍼백도 모아둔다.
나는 이사가 좋다. 미뤄뒀던 걸 정리할 수 있게 해주니까. 공간을 정리한다는 건 나의 우선순위와 선호하는 가치를 다시금 점검하고 선별해서 분류하는 것. 이곳에서 산 2년 반은 고스란히 물건에 쌓여 있고, 그 기억들을 어느 박스에 넣을지 고민해야 한다. 미뤄둔 퇴고를 하는 기분. 폴더에는 초고들은 여전히 많고, 글들을 다시 읽어볼 때면 이 글들을 퇴고하면 깔끔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끝없이 미루고 있다. 내게 마감은 없지만 이사는 있어서, 덕분에 살림살이를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물건들 속에 내가 있다. 물건들로 내가 드러난다. 나는 나의 물건들이 좋다. 물건들을 많이 안고 사는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