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이여 안녕

완주에선 수월한 금주

by 은도

완주 생활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술이다. 서울과 완주 생활의 차이를 가장 절절히 체감하는 것이 바로 술이기 때문에. 서울 살 적에는 애인과 번화가를 누비며 이자카야와 칵테일 바를 탐방하곤 했고, 친구에게 불쑥 연락해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 자고로 술 마시는 즐거움이란 사람들의 취기가 모여 만들어 내는 들뜬 분위기에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내게 완주의 적막한 술집은 성에 차지 않고, 전주에 나가려니 돌아올 방법은 오직 대리뿐. 그렇다고 완주에서 술을 안 마시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잠옷을 챙겨 서로의 집으로 갔고 술집에서 안주를 사와 술상을 차렸고 큰맘 먹은 날에는 친구들과 한 차에 끼어 타고 전주로 나가기도 했다…만 몸속 깊이 방자한 쾌락이 새겨진 술꾼에겐 좀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서울은 술꾼에게 최적화된 유흥의 도시이다. 장소를 옮기며 매번 다른 안주를 시켜 먹을 수 있고, 날이 밝아도 24시간 국밥집이 최후의 성전처럼 불 밝히고 있으며,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다. 술보다 취하는 걸 더 좋아하는 야매 술꾼은 서울의 방탕한 손아귀에 잡혀 행복을 끌어다 술에 쏟아부었다. 옆자리 취한 이들의 연애 상담 얘기를 훔쳐 듣고, 한 사람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 합창하고, 바텐더에서 술을 사고 건배하면서, 홍대와 신촌, 합정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평소에는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이야기도 술을 마시면 술술 풀려나왔고 헤실헤실 웃다가 옆자리 사람과 대화를 트면 우리 모두 친구가 되는 느낌. 서로의 주파수가 맞아떨어지는 느낌. 숱한 흑역사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기분 좇기를 멈추지 못했다.


완주 버전 은도는 나름대로 단정하고 소박한 일상에 행복감을 느끼며 만족스러워하는데, 서울에 가면 맹렬히 고자극을 추구하는 서울 버전 은도가 금세 되살아 난다. 내 서울행 일정 대부분은 술 약속이었다. 자주 갔던 가게들, 좋아했던 가게들을 순회하며 쾌락의 열차에 올라탔다. 취기에 흥청망청 즐거웠던 시절이 서울 곳곳에 남아 내게 손짓한다. 너 이런 즐거움을 잊은 거야? 이래도 안 취하고 배길래? 그러나 술과 함께한 시절은 내 아픈 손가락이자 가장 결별하고 싶은 과거다.


술은 뫼비우스 띠처럼 다시금 술을 찾게 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감이 커질 때면 요동치는 마음을 지워 내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잠시의 즐거움 뒤에는 훅 줄어든 잔고와 되돌아온 헛헛함, 쓰라린 자책감이 남았다. 그걸 잊기 위해 또 술로 도망쳤다. 절제 없음은 해방감과 맞닿아 있었기에 친구들과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 즉각적이고 친숙한 해소 방식이었다. 다른 탈출구를 찾아낼 필요성을 느껴 금주를 시도했지만, 도처에 널린 술집들은 코웃음 치며 술꾼의 다짐을 뒤집었다. 경증 알코올 중독이었다. (질문지를 보면 ‘한국인 중에 알콜 중독 아닌 사람들이 있나?’ 싶긴 하다.)


완주에서 술 마실 기회가 없다는 사실은 당분간 도움이 될 예정이다. 마지막 서울행에서 주정뱅이의 패악을 떨친 이후 완강히 완주 은도 편을 들기로 결심하며 금주를 시작했다. (해제 날짜가 정해져 있는 4개월짜리 금주이지만.)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여름 과일을 먹으며 불멍 했던 밤에는 술 없이도 아쉽지 않았다. 나긋한 편안함이 감돌던 그 밤에는 홀로 돌아오는 길마저 기꺼웠다. 술을 마시면 집에 돌아가길 끈질기게 거부했던 때와 다르게. 친구들의 배웅을 받고 논 사이를 빠져나오자 거리는 온통 컴컴했다. 도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어둠의 깊은 곳을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그 어둠은 사납지 않았다. 이런 외로움은 아프진 않네, 생각했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서울 밤은 처연하고 섬찟하다. 해가 진 뒤 화려하게 불 밝히는 조명들은 병 주고 약 주는 도시의 술책 같다. 빛은 어둠을 밝히려 들지만 오히려 어둠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너무 반짝이고 아름다워 외면하기 어렵지. 그 빛에 속한다면 좀 괜찮아질 것만 같지. 여전히 불쑥불쑥 알딸딸한 기분을 찾게 되는 불안이 찾아온다. 우왕좌왕한 채 다른 위로를 찾는다. 완주 은도는 몸에 익은 습관을 떼어 내면서 서울 은도로부터 차근히 멀어지는 중이다. 아직은 술과, 그 시절의 나와 산뜻이 화해할 순 없지만 언젠가 술과 편안히 조우할 날을 염원한다. 술꾼이여 당분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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