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15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휘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0
"사랑에 빠진 거야?"
...
"난 빠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
p.286
정대건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바이럴 되었던 소설로 기억한다. 집에 놀러온 친구, 책 좋아한다는 회사 동료 모두 급류를 보고는 호기심을 보이면서 '이거 읽고 싶었는데 어때요?'라고 물어봤었다. 회사 동료분은 더 나아가 정대건 작가의 <GV빌런 고태경>이라는 작품을 읽어 봤다며 그것 보고 읽으시는 거냐고도 물어보셨다. 작가분도 꽤 유명한 듯 한데 나는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구매한 책이라 전혀 몰랐다.
그럼 왜 샀나? 정말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짜치지만 인스타 댓글에 누가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부분을 적어놓은 걸 보고 후킹당해서 구매했다. 딱히 고상한 동기는 아니다.
소설은 총 4부로 나뉘어있는데 단순무식하게 정리하면 시골 남녀의 순애 이야기다. 1부를 읽으며 흡입력있는 스토리 전개와 조미료를 많이 치지 않은 슴슴한 문제가 마음에 들어 이 정도면 요즘 읽은 국내 장편 중 으뜸으로 쳐줄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부가 시작되고 점점 뻔해지기 시작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점점 힘이 빠지는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서사가 진행될 때 이야기가 예상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이를테면 헤어진 여자친구를 오랫동안 못 잊는 남자가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의 놀이터로 찾아갔을 때 마침 거기에 그 사람이 있다던가 이런 것 말이다. 한두번은 괜찮은데 이야기의 모든 진행이 이런 우연으로 흘러가면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느껴진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전개된다. 대학에 진학한 두 남녀. 우연하게도 서로 이웃한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맞다.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이 알바하는 가게에 우연히 여자가 회식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 맞다. 헤어지고 각자의 삶을 사는 도중 TV에서 영웅적인 소방관이 소개된다. 혹시 남주는 아닐까? -> 맞다. 그걸 또 여자가 우연히 보고 있지는 않을까? -> 맞다.
사실 나는 요즘 나오는 현대 순문 작품들 전반에 대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는데 메세지에 비해 서사가 너무 부실하다. 그렇다고 문장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니다. 무슨무슨 상을 수상했다는 작품들도 그렇다. 우리네가 살아가는 현실의 한 장면을 글로 기록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그냥 인스타그램에서 릴스 켜면 되는 것 아닌가.
급류를 읽으며 '사랑에 빠진다'는 문장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휩쓸리듯이 떠밀려 내려가고 언젠간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 어쩌면 수영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부분은 작가와 내가 함께 공감한 부분인 듯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은 못 하겠으나 버스나 지하철 타고 오고가며 읽기엔 좋은 책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