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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Jun 28. 2020

흐린 날, 낮게 드리워지는 향내를 맡은 적이 있나요?

속초여행

돌부리에 발길이 걸려 잠시 멈칫거리는 때가 있다. 그것은 불시에 갑자기 일어난다. 그때 무심했던 일상은 새로이 깨어난다. 주변을 둘러보며 내 발길을 정리해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문득 마음의 번뇌를 느끼며, 속내 나누는 친구와 함께 속초여행을 떠났다.


이른 더위에 피서객이 가득한 바다에서 젖은 발에 달려든 모래를 씻느라 분주한 사람들 모습을 마주하며, 아차 싶었다. 텅 빈 바다를 그리며 달려온 나. 골똘함 속에서 현실감각을 잊었나 보다.

그만 계절에게 상상 속 텅 빈 바다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해수욕이 불가능한 거칠고 깊은 바다 쪽 해안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저 멀리 잔잔한 수평선에서부터 여기 철썩이는 파도까지 넓게 펼쳐진 바다. 낮게 또는 끝 모를 높이로 광활하게 공간을 덮은 둥근 하늘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애써 털어내 본다.     


속초에는 가는 곳마다 메밀 막국수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많았다. 그 즐비함에 설득되어 계획에 없던 막국수 식도락을 즐겼다. 


속초의 명물인 닭강정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들른 막국수 집에서는 대도시에서 익숙한 매콤 달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 혀를 새로운 맛의 장으로 이끌었다.고소한 풍미의 콩가루가 잔잔히 배어든 육수는 메밀국수의 맛에 품격을 더해 주었다.     


다음 날 지나던 길. 여지없이 늘어선 막국수 거리엔 유독 한 식당 앞에 차량이 북적였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도 이 곳에 차를 멈추기로 했다. 외딴 거리 음식점 앞 분주한 주차공간에 재빨리 차를 대고 식당 문을 열자 바글바글 막국수 대접에 얼굴을 맞댄 사람들로 가득했다.     


분위기에 동화되어 공격적인 태세로 비장하게 들어서려던 나를 친구가 불러 세웠다.

“여긴 아닌 것 같아” 라며. 그리곤 들어설 때 한적해 보이던 바로 옆집 식당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대박집에 입성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원망이 뒤섞인 체, 할 수 없이 친구를 따라갔다. 환한 대낮에 조용한 식당의 굳게 닫힌 문은 내부의 정적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닫혀있는 몇 개의 문을 돌려보다가 문득 활짝 열리는 문을 만났다.


예상과 달리 아늑한 식당 공간에는 제법 많은 손님이 있었고, 도란도란 풍성한 식사의 장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안도와 함께 기대감으로 서로 눈빛을 나누고 자리를 잡았다.     


후덕한 인상의 사장님은 우리 상 위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메밀 막국수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정성껏 설명해 주신다. 취향에 따라 이렇게 또 저렇게, 몇 가지 양념에 따라 다양한 맛을 체험하도록 손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낯선 여행지의 과객인 우리는 쉽게 만나기 힘든 귀한 맛을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여행이 더 의미 있고 풍성해지는 순간이었다.     



윤대녕의 소설 <상춘곡>은 젊은 남녀가 미처 다 맺지 못한 인연의 필연적인 재회를 그렸다. 세월은 두 사람을 제각각 인생의 풍파 속으로 갈라놓지만, 그 길은 다시 서로에게 회귀하는 운명에 어렵게 한 발짝씩 내딛는 여정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 ‘K’는 인연의 좁다란 길을 따라 운명이 시작되었던 선운사에서 벚꽃이 만개하기를 기다린다. 선운사가 있는 고창 태생의 시인 미당 선생은 마치 운명의 화신처럼 소설 속에서 K 앞에 나타난다. 그에게서 타다 만 목재로 재건된 만세루 이야기를 들은 K는 그제야 매일 무심히 지나던 길에서 만세루를 알아보고, 그 안에서 마침내 만개한 벚꽃 무리를 만난다.  벚꽃 무리 앞에서 비로소 그는 온전하게 맺어지는 인연, 사랑을 깨달았을까?

    


흐린 날 무거워진 공기에 낮게 드리워지는 만세루의 향내는 인연을 드러내고 길의 당도를 깨닫게 한다. 운명의 결정적 변곡점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필연의 길을 외면하지 않도록 매 순간 선택의 길에서 우린 무엇을 보아야 할까?     


막국수를 먹다가 웬 운명이며 인연이 어쨌단 말인가. 뜻밖의 선택으로 만난 귀한 인연이 반갑고 신기해서 엉뚱하게 소설 속 아름답고 모진 인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끌벅적한 명가 바로 옆 초라한 행색을 한 식당에서는 흐린 날 타다 만 목재의 만세루에서 풍기는 목 향내와도 같은 기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운명과 인연의 혼란 속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 헤매고 갈등할 때가 있다. 매 순간 삶은 선택 앞에 놓인다. 눈앞의 현란함에 가던 길이 엇나가지 않기를. 운명의 인연을 향해 우리 발길이 이어질 수 있기를.




생채기가 나도록 힘들게 돌아오는 인연은 흐린 날 자욱하게 목 향내를 드리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드리워지는 목 향내를 느끼며 그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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