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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Oct 31. 2020

만날까요? '톡'할까요?

'접속'. 그 아날로그적 이야기

"우리 만나."

스마트폰 저편에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그 말은 마음 깊은 곳으로 날아들었다. 거기엔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었다.    


스마트폰 시대를 산다. 가상공간 속 ‘톡’의 소통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사이 내 마음도 단단한 금속성으로 디지털화되었던 걸까? ‘만남’이란 친구의 속삭임은 잠시 생소하다가 이내 냉랭한 마음에 따스함으로 번졌다. ‘톡’에 밀려난 ‘만남’이 짓눌린 마음 한구석에서 되살아나는 듯하다.     


동시에 오래전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개봉된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영화 ‘접속’이다. 당시는 pc 통신으로 인터넷이 대중화되며, 바야흐로 가상세계의 문이 막 열리던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접속’은 제목만으로도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 시의적절한 최적의 단어였다. 디지털 가상세계에 아날로그적 따스한 정서가 교차하는 당시 시대상을 절묘하게 그렸다. 미래지향적 현실을 발 빠르게 반영한 영화는 꽤 화제를 모았고 흥행에 성공했다.    


남자와 여자는 (한석규, 전도연 분)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 접속을 통한 가상의 만남을 이어간다. 각자가 지닌 사연과 내면의 아픔을 나누며, 설정된 갈등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은 현실 속 만남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며 상기된 채 미소 짓는 두 남녀를 둘러싼 거리에 주제곡 Lover’s concerto가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한껏 극에 몰입된 관객에게 감동을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영화를 기억하는 이에게는 지금까지도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는 사랑 노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영화 속 가상세계는 따뜻했다.    


당시에 ‘접속’은 신선한 주제였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보는 장면들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물씬 풍긴다. 그 시절 흔한 통신수단이던 낡은 공중전화 부스나 부재중 메시지를 담아주던 자동응답 기능의 전화기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접속을 위해서는 귀가를 서두르고 컴퓨터 앞에 달려가 앉아야만 했다. 광활한 가상공간의 시·공간적 무한성을 뽐내듯 ‘천리안’, ‘나우누리’라는 통신사 이름도 재미있게 느껴진다.     


영화 속 현실과 가상세계의 교차는 꽤 인상적이다. 같은 공간에서 무심히 스쳐가는 은 서로가 타인이다. 반면 가상세계는 두 남녀를 관계로 이끌어 인연에 닿게 한다.


20년  후 오늘의 '접속 시대'를 향한 당시 우리의 낭만적인 기대와 설렘을 영화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미래의 가상세계가 우리를 좀 더 멋진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던 그때 그 기대는 지금 우리에게 부질없는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두 남녀의 싸늘한 교차가 오버랩되는 장면은 현실인 동시에 가상세계의 차가운 단면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불어닥친 디지털 광풍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질주를 거듭했다. 스마트폰 속 가상세계는 이제 우리의 일상이다. 개인의 세계는 접속을 통해 무한 확장되어 세상을 관통한다. 세상의 창은 늘 나를 향해 열려 있다. 원하는 정보와 자극을 접속하고 향유한다. 풍요의 시대다.    


인간이란 참 묘하다. 소통의 과잉을 누리면서 또 소외의 외로움을 앓는다.     


스마트폰 바탕화면의 노란 동그라미 안에는 사람들이 붐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가지런히 무리 져 있다. 무리의 서열을 보면 최근의 긴밀했던 내 관계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화면 아래로는 누군가가 사라지는 중이다. 소통의 풍요 속에서 언제든 원하는 대상과 일상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다. 노란 동그라미 속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다.

    

만나는 건 이제 너무 쉽다. 아니 만남 전에 ‘톡’으로 모든 것이 해소된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퇴적되지 않는다. 디지털화한 마음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네트워크망 속 나는 무수한 점들 중 하나로 무의미하게 존재한다. '톡' 안의 만남은 목적이기보다는 기능적 수단으로 작동한다. 그 톱니바퀴 어딘가에 내가 끼어 돌아간다. 소통의 과잉은 그리움을 희석하고 만남을 소모한다.    


통신수단이 없던 시대의 소통은 맨몸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넜을 것이다. 켜켜이 묵힌 그리움, 기다림의 짙은 만남은 운명이고 역사였다. 그 시절 가상세계는 인간의 상상 속이었다. 수천 년을 넘나드는 전설과 생사를 초월하는 윤회의 믿음처럼 인간에게 만남은 삶이고 생명이었다.     


만남은 이별과도 맞물린다. sns 망에 있는 우리는 이별조차도 쉽지 않다. 대상은 늘 가상공간의 그 지점에 떠있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망 안에서 그를 볼 수 있다. 다만 잊혀짐의 소외가 있을 뿐이다.     


아니 물론, 스마트폰 세상의 편리함은 너무도 소중하다. 접속으로 많은 것을 누린다. 따뜻한 소통으로 서로 더 친밀해지기도 한다. 사랑을 느끼며 행복할 때도 많다. 그리움을 묵히려 마법의 폰을 포기할 이유 더더욱 없다.

다만, 편리의 과잉에 마음의 깊이를 잃지 않도록, 어지럽혀진 스마트폰을 재부팅하듯, 자꾸만 본연의 나로 회귀를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가을이 깊었다. 결실의 계절, 상실의 계절이다. 낙엽이 뒹구는 거리에서 유독 외롭다면, 네트워크 속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자신을 '만남'으로 건져내는 건 어떨까? 마음 깊은 곳 그리움을 뒤적여낸 따스한 만남으로 또는 아픈 이별로 잃어버린 만남의 전설을 되찾는 가을이길.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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