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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11. 2020

향긋? 현실은 비릿

글쓰기에 대해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이지만 자연만큼은 참 공평하다. 1년, 하루라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양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시간이 우리네 삶으로 흘러들어오면, 각기 다른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한 무게와 의미를 지닌 만 가지 삶으로 피어난다.

미지근한 열정으로, 생활을 주도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때우는 삶의 시간은 피어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것만 같다. 그런 기분에 초조하고 불쾌해질 때면 주부인 나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 진다.


그럼 요리가 취미냐? 내가 못하는 것 중 으뜸이 요리이기에 평소에는 요리라는 난관을 건너뛰려 발버둥 치며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오롯이 나로 인해 탄생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알록달록한 음식 한 접시의 성취감은 죽어가는 나의 시간에 숨을 불어넣어준다. 마치 출산이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에 없던 것을 탄생시켰다는 뿌듯함으로 의미를 과대 포장할 수 있다.

된장국, 김치찌개 같은 기본 매일 메뉴보다는 콩찰떡이나 수제 어묵, 렌틸콩 수프, 문어초밥 등 조금은 생소한 나만의 망작의 기쁨은 훨씬 더 크다.
그 낯선 맛에 경악하는 이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내가 글을 쓰려고 머리를 뜯고 있는 것도, 서툰 음식을 만들려는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매일 어제의 나를 잊으며 살아갈 때면 투명하게 증발하는 내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고, 생활의 틀 안에 갇혀 숨이 막혀올 때는 가끔 새로운 바람이 내 몸과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진다.

 어릴 때 집에 놀러 오시는 이웃 아주머니들은 내게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했다.  

쟤는 어쩜 저렇게 없는 것처럼 조용할까?


자주 듣지만, 들을 때마다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듯한 그 말이 참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도 줄곧 ‘조용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동물적인 본능의 존재감에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어쩌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나만의 ‘아우성’ 같기도 하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나는 불현듯 낱말 자체가, 달리 말해 낱말의 소리와 그로 인한 연상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글을 쓰려 애쓸수록 궁핍한 삶의 내면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나지만, 내가 불러낸 단어들의 조합으로 문장을 만들고 한 장의 글을 완성했을 때, 세상에 없던 졸작을 탄생시켰다는 후련함이 즐겁다. 지금은 방향을 모르는 걸음마를 한 걸음씩 떼고 있지만, 진심을 다 해 가다 보면 내 삶의 이상을 따르는 길에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밤도 모처럼 글 한 장이 탄생했다. 향긋함을 꿈꿨지만 현실은 역시나 비릿한 렌틸콩 수프 같은 맛의 글이다.


졸작은 죄가 없다. 살아있음의 증거일 뿐.
누구에게나 가슴 한 구석에는 잠든 ‘카프카’가 웅크리고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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