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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Nov 01. 2020

내 하루는 반 잔

순간을 배회하며.

9 to 5. 직장인의 하루는 딱 숫자로 요약된다. 나도 여기에 순응하며 산다.

일주일 중 5일은 계획된 하루의 쳇바퀴 안에서 기계처럼 착착 돌아간다. 기상을 재촉하는 알람과 씨름하며 아침을 맞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 저녁 시간의 여유를 잠깐 방황하다 보면 하루가 저문다. 주어진 일정을 따라 돌아가는 평일의 시간은 막힘없이 흐른다.     


눈을 뜬 방안에 빛이 한가득이다. 하루가 또 물밀 듯 밀려든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으니 주말이다. 휴일 늦은 아침, 방을 감싸는 따스한 햇볕이 더없이 달콤하다. 텅 빈 하루의 자유에 설레는 순간이다. 그리곤 이내 서성인다. 자유의 시간에 자유롭지 못한 채 버거움을 느낀다. 하루는 365번씩 50여 차례나 되풀이됐지만, 새 하루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다가 이내 버거워진다. 하루라는 텅 빈 그릇이 숙제로 다가온다. 뭔가 값지고 아름다운 것을 잔뜩 채울 욕심이 고개를 내민다. 머릿속에선 해야 할 것, 의미 있는 것, 하고픈 것들을 늘어놓고 이걸 담을까 저걸 담을까 끊임없이 머뭇거린다. 계산만 튕기다가 얼렁뚱땅 하루를 흘려보내고 어두워지면 아쉬움만 가득하다.      


서툰 직장 일에, 바쁜 육아와 가정사에 허덕일 때는 지금의 시간을 갈구했다. 벼르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자유라는 멍석 앞에서 왜 불편해지는 걸까? 내 삶의 습성은 계발과 성장 시대의 미덕을 주입받고 살아온 데서 만들어졌다. 성취를 위해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성취는 눈에 보이도록 계량적이고 수치화된 효율을 따진다. 게으른 내게 가당찮은 ‘근면’과 ‘성실’은 생활 대신 내 정신을 옥죄고 놓아주지 않는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심이 생긴다. 하루를 속도감 있고 민첩하게 사는 친구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해 먹고, 알찬 쇼핑과 운동을 하고, 남을 위한 봉사도 한다. 그중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나로서는 ‘꽉 찬 하루’를 완성하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부지런한 친구는 집안 살림을 다 하고 직장에도 다니면서 자기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업가임에도 열심히 운동해서 늦은 나이에 젊을 때의 날씬한 몸을 되찾은 친구도 있다. 세상을 유익하게 이끄는 훌륭한 유명인사의 삶은 또 얼마나 멋진가. 성취를 비교하며 내 하루가 또 초라해지는 순간이다.      


다람쥐도 '하루'를 살까? 먹이를 찾고, 집을 짓고, 새끼를 낳고, 뜨고 지는 해와 함께 깨고 잠드는 그들은 하루가 아닌 순간을 산다. 시간으로 조각나지 않은 삶은 매 순간이 생애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은 매 순간 일생을 산다. 인간의 시계로 하루살이의 일생이 짧다고 단정하는 건 틀린 것 같다. ‘하루살이’란 말은 오히려 하루 앞에서 서성이는 내게 어울리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즉문즉설의 대가 법륜스님의 ‘다람쥐처럼 산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곱씹어 본다.

     

시간은 인간에게서 비롯됐다. 자연을 문명으로 변주해 삶에 시간이라는 마디를 그었다. 시간을 알아차리면서부터는 매일 한 발짝씩 거리를 좁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한다. 삶이 다급해진다. 하루가 버겁다. 아직 오지 않은 ‘끝’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하루를 버둥거린다. 시간을 모른 채 순간을 사는 다람쥐에게서 내 하루의 허상을 본다.

     

9 to 5. 시간의 쳇바퀴에 쫓기는 생활이지만 마음까지 가두고 싶진 않다. 순간을 놓치고 시간에 붙들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겠지만, 하루가 아닌 ‘순간’의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자유롭게 숲을 누비고 바다를 헤엄치는 그들처럼. 정지한 듯 느긋하게 일렁이는 나무처럼.

순간을 살다보면 텅 빈 하루에서도, 바쁜 일상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외적인 성취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고 텅 빈 하루 안에 온전히 들어가 잠긴다. 마음의 뒤안길에 잠든 기쁨과 슬픔을 깨워 충분히 음미하고 사색한다. 순간들을 느긋하게 배회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반 잔만 채워도 충분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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