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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r 09. 2021

종로에는 갈잎이 뒹군다.

스무 살의 흑백사진

      

“기분전환 어때?”

폰으로 전해지는 친구 목소리가 날아갈 듯 가볍다. 입시를 끝낸 고3 엄마로서 짐을 훌훌 벗어던지는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맛난 거라도 먹자는 거겠지. 아니면 근거리 여행이라도?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의 제안은 평소 내가 생각지 못하던 거여서 생소했다. 철 지난 장신구를 모아 최신 유행하는 걸로 바꾸러 종로에 가잔다. 집도 직장도 외곽에 있는 내게 서울 나들이는 제법 거한 외출이다. 게다가 ‘금은방’이라니.      


장신구란, 내게는 번거로운 거여서, 시큰둥한 마음으로 서랍을 뒤적인다. 게으른 동작으로 깊숙이 손을 뻗으니 수십 년째 케케묵은 함이 끌려 나온다. 그런데 열어 보니 제법 있다. 금속에 빛이 닿자 긴 잠에 빠졌던 가락지들이 화들짝 깨어난다.


‘이건 언제 적 거지?’ 얇실한 반지는 스물 시절 연인과 함께, 귀여운 디자인이 포인트인 건 졸업을 기념하며, 알이 박혀 굵직한 가락지는 결혼예물이다. 마디 굵은 손가락 끝에 반지를 대어 본다. 분홍빛 옛 추억에 절로 웃음이 번진다. 수십 년 묵은 내 스물들이 손바닥 위에서 묵직하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듯한 기분이다. 그것들을 가방에 담고 종로행 지하철에 올랐다.

     

오래전 그때 대로변 뒤로 구불구불 늘어섰던 금은방들은 이제 반듯한 종합상가로 변신했다. 이따금 결혼을 앞둔 듯한 연인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락거린다. 우리도 덩달아 설레며 따라 들어갔다.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쇼윈도 안에서 이쁜 것들이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우린 곧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언니가 고교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은 종로 근처였다. 언니는 가끔 아직 학생이던 작은언니와 나를 회사 근처로 불러내 맛있는 걸 사줬다. 퇴근 시간에 맞춰 언니가 일러준 대로 버스를 타고 찾아간 도시는 복잡하고 크고 높았다. 처음 가본 경양식집 어둑한 조명 아래서 먹던 돈가스 맛은 최고였다. 그때 갓 스물이던 언니는 그 거리에 우뚝 선 빌딩만큼이나 멋지고 우러러 보였다. 종로에 대한 내 기억의 시작이다.     



그렇게 크고 멀던 종로 거리는 얼마 후 스무 살을 맞은 우리에게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대형 서점가 만남의 무리 속에서 나도 늘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였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입은 거리에는 내 또래 젊은 애들이 북적였다. 거대한 인파를 헤치며 팝 비디오가 번쩍이는 카페나 주점들, 상점을 누비며 시시덕거렸다. 종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우린 종횡무진 지칠 줄을 몰랐다. 도심 뒤 한적한 공터에서 그네에 몸을 흔들며 연인과 동료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정동 길가 성당 앞을 거닐었다.


고단함도 있었다. 직장인이 되어서는 새벽 출근길 만원 버스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그 거리를 달렸다. 늦은 밤 퇴근길 어느 날, 파김치가 돼서 걷는 내 앞을 가로막던 승용차 속 음흉한 눈빛에 소스라칠 때는, 이 거리가 춥고 낯설었다.

매캐한 이념의 향취가 무지한 내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한 곳도 그 길 끝 서울역 앞 광장 거리였다.


 종로에 가면 여기저기서 스물의 나를 만난다. 빛나는 무지갯빛으로, 때로는 휘청이는 밤거리의 검은빛으로, 광장의 핏빛으로 되살아난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거리는 낡고 텅 비어 간다. 간판에 묵은 먼지가 끼고 전선이 뒤엉킨 전봇대가 방치되어있다.


한쪽에서는 파스텔톤으로 새 단장한 거리에 또다시 젊은 물결이 밀려든다. 화색이 도는 거리를 반갑게 쫓다가,어색해진 마음에 뒤돌아서서 옛 골목에 이르니, 나와 같은 눈빛을 한 중년들이 걷고 있다.



거울 앞에 앉았다. 목이랑 팔뚝에는 스무 살 적 가락지와 맞바꾼 핑크 골드가 반짝거린다. 거울 속 주름진 여인이 웃는다. '이렇게 스물을 품고 살아가는구나.'


핸드폰에 막내 조카 졸업사진 한 컷이 떴다. 꽃다발만큼이나 만발한 미소로 ‘브이’. 높다란 스물 담벼락을 사뿐히 타고 넘은 듯, 치맛단 아래 종아리가 공처럼 탱글거린다. 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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