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동네 골목에는 길을 닮은 긴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렇다고 요즘 공원에서 볼 수 있는 예쁘고 튼실한 벤치를 상상하면 안 된다. 널빤지 한두 조각에 다리가 될 만한 나무토막 몇 개가 재료의 전부인 만큼 왜소하고 엉성한 모양새였으니까. 의자는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조심하지 않으면 표면에 조금 도드라진 못대가리에 옷이나 피부가 상하기 일쑤였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까? 나무 속살의 뽀얀 빛깔은 간데없이 잿빛으로 바래고, 앉는 표면은 반질거렸다. 한때 날렵하게 각졌을 가장자리는 불규칙하게 깨져 나가 그마저도 닳고 닳아 뭉툭하고 둥글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눈보라와 비바람을 견뎠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동네 아이들 놀이가 시작되고, 마을 소식이 퍼져나가고, 어르신들 막걸릿잔이 오갔다. 심심할 때면 집에서 나와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하나둘 애들이 모여들었다. 끝내 아무도 오지 않으면 심드렁한 마음에 발바닥만 구르다가, 의자 틈새를 타고 기어오르는 개미 꽁무니를 쫓아서 추근대며 한참을 놀았다.
빈약한 내 책꽂이 한구석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흑백 그림책인데 너무 오래돼고 낡아서 책장이 누렇게 바랬다. 제목처럼 나무는 소년에게 자기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다. 어린 소년일 때 나무는 그의 놀이터였다. 어른이 되어 세상에 지쳤을 때는 그의 쉼터가 되어주고, 돈이 필요할 때는 사과 열매를 내줬다. 집을 짓도록 가지를 내주고, 그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할 때는 배를 만들 수 있도록 몸통까지 허락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나무는 단지 병약한 그의 몸이 쉴 수 있는 그루터기로만 남아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벤치에는 지난여름이 새겨져 있다. 장대비가 퍼붓던 밤 우리는 등나무 덩굴 밑 이곳에 몸을 피했다. 세찬 빗줄기는 가로등 불빛을 가르며 순식간에 나무와 대지를 적셨다. 세상은 비에 갇히고 우리만 남은 듯 속삭이며 크게 웃었다. 오늘은 고운 눈을 맞으며 텅 빈 채 고요하다.
나는 의자가 좋다. 의자가 품는 여백의 표정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런 만큼 언제 어디서든 의자는 내 이목을 잡아끈다. 심심할 때면 유명 브랜드의 유명 예술가가 디자인했다는 의자들을 검색해 구경한다. 멋진 곡선과 직선이 만나 허공을 품는 아름답고 기발한 의자들이다. 공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포근하고 아름다운 의자는 없을까? 늘씬하고 단단한 의자보다는 둥글고 나지막한 의자가 더 좋다. 삶을 품는 형상을 지닌 의자는 따스하게 살아있는 듯하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맘에 드는 의자를 만나면 그날 하루가 즐겁다. 수집하는 취미를 갖는다면 주저 없이 의자를 모을 것이다. (이미 집에 들인 의자는 낡고 쓸모없어져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널려있다) 갖가지 표정을 지닌 의자를 모아 두고 기분에 따라 요것조것 골라서 앉고 싶다.
사실 더 바라는 건 운명의 의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바람을 부추긴 건 소설 <스토너>다. 중년의 남자 스토너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그린 이야기다. 바로 그때 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내듯, 그는 지난날 자신을 둘러싼 사랑, 행복, 슬픔, 고통의 순간을 되살린다. 그 모든 추억을 기쁨의 눈물로 환희하며, 죽음을 맞는다. 그의 집 빛이 드리워진 창가 안락의자에서.
이야기는 두려운 종말로서 죽음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깨뜨려 준다. 대신 낯선 희망 한 자락을 내비친다. 이상적인 죽음의 그림이랄까? 죽음이라는 마법은 지나온 영욕의 삶을 충만한 기쁨의 꽃가루로 변모시켜, 그 길 위에 뿌려주는 축복이자 삶의 완성일 수 있다는.
평화로운 죽음은 모든 산 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통해 되살아난 내 욕망은 엉뚱하게도 그가 죽어간 ‘운명의 의자’에 집착하고 있다. 아름다운 종말을 향한 확실한 단초라도 되는 양 말이다.
거실 소파는 몇 년을 벼르고 별러 선택했건만, 내 체형에 맞지 않아서 앉으면 금방 허리가 아파오고 자리에서 미끄러지기 일쑤다. 외형에 반해서 거금을 들인 걸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미우나 고우나 손때가 짙게 밴 채 바로 지금 내 곁을 지켜주는 이 자리가 다름 아닌 운명의 그 의자가 아닐까 싶다. 마치 파랑새처럼.
상상 속 아름다운 의자를 꿈꾸는 건 어쩌면 부유하는 내 삶을 좀 더 깊게 뿌리내려 집중하고픈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골목길 의자처럼, 노인의 그루터기나 스토너의 안락의자처럼, 삶이 생동하고 완성되는 순간을 품어줄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멋진 삶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