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나선 산책길을 마중해주는 봄비 소리가 경쾌하다. 주말 늦은 아침, 게으른 태양이 비구름을 덮고 반쯤 눈을 감은 듯 사방이 어두컴컴 고요하다. 며칠 만에 다시 걷는 길은 그새 봄기운이 심상치 않다. 여린 빛의 새싹들, 개나리며 진달래, 목련꽃 봉오리들이 앞다퉈 움트느라 자기들끼리 야단법석이다. 우당탕퉁탕 느닷없이 안겨드는 아기 걸음마처럼 봄은 내 품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다시 봄이다.
날이 풀리면 몸도 기척을 한다. 쉽게 피로를 느껴 머리도 띵하고 졸음이 몰려와 하품을 연발한다. 어릴 때는 그런 봄이 싫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나른함이 불쾌했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몇 번의 섬뜩한 가위눌림도 늘 봄과 함께였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TV에서는 시끄럽게 꽃 소식을 전하고, 거기에 휩쓸려 몰려다니는 어른들도 영 촌스럽게만 보였다. (지금은 내가 그 장본인이지만)
오래전 잊혔던 가위눌림이 어제 새벽잠에서 되살아났다. 좀처럼 드물게 꿈도 꿨다. 봄이구나. 겨우내 얼었다 풀리며 활력을 찾고자 꿈틀거리는 몸의 생리현상쯤으로 짐작한다. 구석에 밀쳐둔 비타민이며 건강보조식품들을 꺼냈다. 적어도 이 봄 동안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먹을 작정이다. 나만의 봄 채비다.
'엄마, 불 좀 꺼줘.' 산책을 나서는 나와 달리 아이는 여전히 이불과 뒤엉켜 다시 잠을 청한다. 막상 봄인 것들은 계절을 맞는 자세가 심드렁하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봄에 요동치는 쪽은 역시 따로 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윗집 할머니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아예 우리 동 엘리베이터를 점령하다시피 하신다.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할머니가 계신다. “안녕하세요?” 무뚝뚝하게 서로 외면하던 탑승 분위기는 할머니 덕에 한껏 화목해졌다. 굽은 허리에 느린 걸음으로 할머니는 시멘트 건물을 빠져나간다. 다시 더듬더듬 걸어 잔디마당 벤치에 앉아 살랑이는 풀꽃을 응시하다가,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우신다. 할머니가 즐기는 봄맞이 화려한 외출이다.
게이트볼장에는 어르신들이 모여들었다. 딱딱 공을 맞히는 소리, 박수와 웃음소리에 적막한 겨울의 흔적은 자취를 감췄다.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의 노인 한 무리는 숲길 산책을 즐긴다. 그 틈을 비집고 나도 걸었다.
봄은 봄 아닌 이들에게 가장 먼저 축복인 건가?
예전에 식물에 대한 내 생각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잠에 빠진 듯 정적인 모습이 매력 없고 시시했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이 답답하고 처량했다. 다행히도 나는 동물로 태어났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생의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 바라보는 꽃과 나무는 생명 그 자체다. 나이테로 세월을 쌓으며 계절 따라 새롭게 피고 지는 삶, 겨울 안에 깃든 봄의 희망은 경외와 신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우리 삶은 어떤가. 아이는 어른이 되고, 자식은 부모가 된다. 입학, 결혼, 취업, 미지로 여행과 모험 등 수많은 삶의 변곡점을 맞아 새로운출발을 다진다. 성취와 좌절의 고개를 넘나들며 어느새 심신은 점점 쇠해진다. 지나온 세월만큼 자꾸만 작아지는 내 미래의 크기를 넘겨짚다 보면, 삶을 지탱하는 희망도 점점 잦아든다.
언젠가 TV에서 오랜 시간 투병 중인 환아의 엄마가 말했다. “우린 늘 오늘을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이라는 희망에 기대어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와락 안긴 봄의 생기는 내 삶도 나무의 생명력과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 보인다. 윗집 할머니의 화려한 외출이 그렇고 투병 중인 아이 엄마의 미소가 그렇다. 새해 새봄뿐 아니라 매월, 매일, 매시간 언제든 새로워질 수 있다. 봄을 맞으려는 의지의 싹을 틔울 수만 있다면.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봄맞이 군살 빼기 다이어트.
어제는 그걸 기념하느라 초코 아이스크림과 케익을 먹고 말았다. 맙소사, 새 출발은 매번 공수표를 날린다. 그래서 또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