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이 May 08. 2020

좋은 사람

한 참 좋을 때야 !

“한 참 좋을 때야.”

이런 말은 언제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며칠 전 마흔 살 조카에게서 이모인 내가 들은 말이다. 육아에 한창인 조카가 수십년 육아의 세월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에게 던지는 말에 수긍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 큰언니는 결혼하자마자 첫 딸을 낳았다. 어린 엄마였던 언니는 집에서 얌전히 살림과 육아에 집중하기에는 담장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컸었나 보다.  아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는지, 친정의 우리 자매들에게 수시로 통보도 없이 어린 조카를 던져두고, 자기 볼일을 보러 내빼곤 했었다.

 10대, 20대의 어린 이모들 사이에서 서툰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한 웃음꽃을 우리에게 선물하던 사랑스런 조카와의 추억이 참 많다.


조카는 가끔 곤란에 빠진 우리 자매의 수호천사가 되어주기도 했다. 호랑이 할머니의 호된 꾸지람에 단체로 벌이라도 설 때면 함께 울며 벌을 서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머니의 때 낀 고무신을 욕실로 가져가서는 깨끗이 닦아 세워 놓고, 할머니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눈치 빠른 아기였다. 그리고, 가끔은 서로들 바빠서 돌볼 손이 없을 때 조카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언니들이 모두 직장에 다니고,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어 수 없이 학교에 데려가서 수업 없는 친구들 손에 돌려가며 조카를 돌봐야 했던 적도 있었다.



몇 년 뒤, 사귀는 남자친구를 언니 부부에게 선보이러 갔을 때, 초등학생이 되어있던 조카는 수줍어하며 문 뒤에 숨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육아의 독한 맛을 미리 예습시킨 언니를 향해 우리 자매는 앙갚음의 날을 도모하곤 했었다. 그런 심정으로, 나는 첫아이를 출산했을 때, 아직도 젊디젊은 큰언니 집에서 산후조리를 위해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 당당히 드러누웠다.


그때도 언니는 며칠 간의 산후조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동네일에 간섭하러 다니느라 산모인 나를 돌보는 일에는 설렁설렁 이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돌아온 조카는 내 곁을 지키며 갓 태어난 사촌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개구쟁이 남동생이 손대지 못하게 어른스런 단도리를 도맡아 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기가 어른으로 자라는 모습을, 소녀가 중년으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서로 바라봐 주며 살아왔다. 지금은 그 꼬맹이가 아이 둘의 엄마로 능숙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 사는 게 늘 어리바리한 이모인 나에게 듬직한 동지가 되어주고 있다.

유행에 뒤떨어지는 매무새를 챙겨주고,  잔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장성한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때면 조카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녀는 나에게 수시로 안부를 묻고, 같이 놀자며 만나기를 졸라 준다. 못 이긴 척 만나 밀린 수다를 풀 때면, 친구나 가족에게 털어놓기 힘든 별별 얘기들을 주고 받으며, 삶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 놓곤 한다.


가족인 듯 친구인 듯 관계의 색채가 특별하고, 동시대인 듯 아닌 듯한 사이에서 생기발랄함이 느껴진다. 서로의 미숙함을 감싸주고 격려하고 조언하는 우리 관계가 요즘 더 없는 위로가 되고, 소중하게 느껴져서 몇 자 기록해 본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이만큼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조카가 나에게 건넨 말 “한 참 좋을 때야.”
무엇을 하기에 좋을 때일까.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에 좋을 때’라고 의미를 담아본다.

이전 03화 나는 매일 흥얼거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