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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07. 2020

나는 매일 흥얼거린다.

내가 욕망하는 것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삶이 곧 창작이기 때문에.


태어남과 죽음 사이 인생의 논픽션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 만의 그림으로 운명과 더불어  그려나간다.


며칠 전 창 넓은 카페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이 지긋한 카페 사장님이 슬그머니 우리 사이에 끼어드셨다. 아침 산책길에 늘 노래하기를 즐기는 그분은 노래를 배우고 즐기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멋진 일인지 한참 동안 수다를 늘어놓으셨다. 급기야 즉석에서 가곡을 멋지게 열창하시는 통에 우리 일행은 어느새 그녀에게 이끌려 입술을 달싹이며 떼창에까지 이르렀다. 그 조용한 페에서 말이다.


노래하는 그녀의 표정과 한 껏 홍조 띤 얼굴에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녀의 현재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을 때, 주름지고 머리 희끗한 분들이 노래교실을 찾는 걸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다. 심지어 '그냥 혼자 부를 일이지 배우기 까지야. 할 일 없군.' 라며 치부했었다. 당시의 어리석었던 나는 대중가요나 음악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쯤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어느새 주름지고 머리 희끗해진  지금 나야말로 늘 음악을 즐긴다. 흘러간 노래나 우아한 클래식 뭐 다 아름답지만, 최근에는 한 창 잘 나가는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출신 가수의 음악에 흠뻑 빠져 있다.


처음 그는 단지 '아이돌'이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예술로 변모되었다. 노래가 좋은 건 물론이고, 공연하는 동안 그의 숨결, 눈빛, 몸짓, 에드립, 심지어 주변에 느껴지는 바람의 흐름조차도 온통 아름답다. 음악과 노래 안에 스스로를 녹여 하나가 되는 그의 멋진 공연을 볼 때 너무나 감동적이다. 동시에,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땀과 눈물 어린 열정을 엿보며 또 다른 감동에 빠진다.  정도 팬심이라면 '내 눈에 콩깍지'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빠져있음이 분명하다.


음악과 사랑에 빠질 때, 나는 어느 시인이 한 말 '곁에 있어도 그립다.'의 의미를 격하게 공감한다. 그렇게 수초 전 흘러간 리듬과 선율이 자꾸 그리워 미칠 것 같을 때는, 내 입으로 능숙하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찾아 노래하기를 시도한다.


내 순발력이 변한 건지 요즘 트렌드가 변한 건지

음이 빠르고, 박자와 숨의 밀고 당김도 절묘해서 편안하게 따라 부르기까지 상당한 난관에 부딪치지만, 나의 노래 사랑은 높은 산도 넘고, 너른 바다도 건넌다. 그리곤, 청소를 하거나 빨래 널 때, 멍하니 있을 때 수시로 흥얼거리는 성취감을 맛본다.


년 전 친지 댁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나에게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 지금 노래 부를 기분이에요?"

좋지 않은 일로 분위기가 무거운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 말이 없는 편이다. 아니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니 입을 다문다고 해야 맞겠다. 그것이 때론 오해를 일으키고, 나의 욕구나 감정은 내 안에서만 맴돌기 마련이다. 그럴 때 노래는 꽉 막힌 나를 순환시켜 살게 만드는 숨과도 같다. 나는 대답했다.

" 난 노래를 하면 숨통이 트이고, 막 마음이 포근해져. ㅇㅇ도 해보세요."


어린 시절 나의 외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여섯 손녀의 가장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삶은 늘 비장하고, 거칠고 , 긴장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도 가끔은 고단한 하루가 저문 밤 잠자리에 들며 옷고름을 풀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몸을 누이곤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음을 섞어 흥얼거리곤 했다. 할머니의 십팔번 노랫말 기억나는 대목은

 

"낙영성 심리허에 높고 낮은 저무덤에 영웅호걸이....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인생무상을 노래한 '성주풀이'의  처음과 끝 대목. 인터넷으로 검색 )


그럴 때 할머니는 다른 사람 같았다.  엄한 낯빛은 말랑하게 풀어져서 아련한 시선이 허공을 향하고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비바람에 던져진 삶 속에서, 잠시나마 자기 안에 침잠해 있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에게도 있었을 기쁜 추억과 욕망을 마주하며, 현실을 달래는 시간이었으리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인생의 벗 된 심정으로 말하고 싶다.  


" 할머니, 당신의 삶은 예술이었어요.

그 모든 걸 기쁘게 추억하시면 좋겠어요."


삶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예전에는 어른들의 노래로만 여겼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부터 '너의 눈, 코, 입~~' 최신 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서를 두루 섭렵하는 나는 원숙한 예술 감상가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태곳적 인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노래는 존재해 왔을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은 물론, 어쩌면 식물도 필요와 욕망에 따라 소리로, 움직임으로 노래를 누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저마다 고유의 비밀스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다.


내게 노래는 어떤 의미일까?  희로애락 가득한 못된 욕망의 아름다운 분출구가 아닐까? 흥얼거리다 보면 화해와 사랑의 감정이 솟는다. 차마 말로는 표현 못할 감정의 외침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괜히 걱정이 앞선다.  노래를 즐기이에게 노래를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리지는 말자. 각자 자기 노래를 찾아 즐기면 그뿐이다. 물론 사랑하는 이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한 가지 더, 흥얼거리는 순간의 나는 늘 욕망 덩어리만은 아니라고 지레 변명하고 싶다. 그냥 심심해서 부를 때가 더 많으니까 날 선 시선일랑 거두시기를. 다만 그 비율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


노래하자.  삶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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