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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Oct 17. 2020

커피는 필수, 밥은 선택?

그 시절 ○○녀는 다 어디로 갔을까.

국민(초등) 학생 때였다. 아랫방에 사는 백수 오빠가 어느 날 우리 자매를 불러 모았다. 진기한 걸 맛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오빠는 자기네 부엌에서 누런 주전자와 쇠 밥그릇 뚜껑을 가지고 나왔다. 행동에 앞서 보란 듯이 지어 보이는 묘한 표정은 우리 기대를 더욱 부풀게 했다. 오빠는 드디어 주전자 속 비밀스러운 액체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고동색 국물이 뚜껑에 쏟아졌다. 그 액체가 공기에 뒤섞여 빚어내는 향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향기로웠다. 우리 자매는 호기심 가득한 눈코입으로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돌려가며 문제의 액체를 맛보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소함과 달콤함, 쌉쌀함이었다. 커피와 첫 만남의 기억은 짙은 그 향만큼 강렬했다.

     

커피와의 재회는 대학 신입생 때 강의실 복도 끝 구석에서 이루어졌다. 걸쭉한 자판기 커피는 서먹하고 멋쩍은 신입생에게 달콤 쌉싸름한 위로 한 모금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둘러선 그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면 제법 삶이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쩍 친해진 몇몇 친구들과는 가끔 의기투합하여 지루한 강의실에서 무단 탈출을 감행했다. 소심한 우리가 저지르는 작은 일탈은 늘 커피와 함께였다. 단골 다방에 턱을 괴고 앉아 500원짜리 커피를 홀짝였다. 핑계는 늘 있었다. 첫사랑 실연에, 미래에 대한 불안에, 눈이 와서, 비가 와서, 낙엽이 지니까 등등. 치졸한 사연들이 향긋한 커피 향에 그럴싸한 정당성과 멋을 부여받기라도 할 것처럼.



한 때는 ‘된장녀’라 불리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 특징 중 하나는 로열티를 지불한 외국산 커피 브랜드의 종이컵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었다. 의미를 짐작컨대, 당시 우리가 선망하던 유럽의 도시 또는 뉴요커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듯한 그녀들을 빗대어, ‘그래 봤자 당신은 (된장을 주로 먹는) 동양의 작은 나라 소시민임을, 즉 ’ 주제를 알라’는 비아냥이 아니었을까.

조카도 그 대열에 서 있었다. 전업주부인 조카는 유모차를 끌고 부지런히 카페에 들락거렸다. 집에 사둔 성능 좋은 커피머신은 고이 모셔 방치했다. 번거로운 외출을 매일 감행하는 조카를 내심 이해하기 어려웠다. ‘매일 그 돈을 모으면....’ 혼자 헤아리며 혀를 차곤 했다.

‘나는 그녀와 달라!’라는 단정은 섣불렀다.      


우리에게 불어온 커피 바람은 참으로 거세었다. 이제 된장녀라는 말은 용도 폐기된 듯하다.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우리 대다수가 예의 그 ‘된장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점 거리를 걷다 보면 실감하게 된다. 제각각 개성을 뽐내는 카페 거리가 동네마다 즐비하다.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은 그 사이에서 간간이 눈에 띌 뿐이다. ‘커피는 필수, 밥은 선택’인 시대를 산다. 커피에 식사를 곁들인다. 실상을 알리듯 베이커리 카페나 브런치 카페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커피 1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 때는 (현재 꽃중년) 인스턴트커피에 프림 가루로 고소함을, 설탕으로 단맛을 더했다. 커피/프림/설탕 비율에 따라 112, 121, 111 등으로 나름의 다양한 맛을 추구했다. 지금은 원두의 생산지와 추출법, 맛을 더하는 재료에 따라 커피의 세계는 더욱 넓어졌다. 가히 학문의 경지에 이를 만큼 심오한 듯하다. 사람마다 취향도 더욱 다채롭다.      


살아계셨다면 100세를 훌쩍 넘기셨을 외할머니도 말년에는 커피 마니아였다. 폭풍 같은 삶이 지나가고 남은 허무의 시간에 할머니는 커피를 친구 삼았다. 늘 먼발치에서 우리를 바라보셨지만, 식후 커피 타임만큼은 꼭 우리 틈에서 빠지지 않으셨다. 할머니 커피잔은 늘 별도였다. 모두 똑같은 맛이었지만, 할머니 커피에는 반드시 소금 한 꼬집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요즘 일부 커피 마니아층에서 소금 커피를 즐긴다고 한다. 할머니 취향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해야 할까? 알고 보면 할머니가 원조 '된장녀'인 셈이다.



 커피 바람에 카페가 대세다. 아름답고 재미나고 우아하고 기발한 카페들이 넘친다. 이제 소소한 나들이나 기분전환을 위해 사람들은 카페로 외출한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해도 좋고, 혼자여도 좋다. 아기자기한 동네 카페에 남녀노소가 북적일 때는 마치 대가족이 함께하는 느낌이다. 한쪽에서는 발랄한 무리가 포즈를 취하고 서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며 히히덕거린다. 창가에 앉은 백발노인의 노을 진 눈빛은 그윽하고 고요하다. 개구쟁이를 잠시 스마트폰에 맡긴 아이 엄마는 모처럼의 여유를 즐긴다. 나의 세계 너머에 있는 젊은 세대, 노년 세대와 커피 향 가득한 공간을 함께 한다. 젊은이도 노인도 나도 짙은 커피 향에 각자의 한과 흥을 띄운다.


서로의 삶은 달라졌다. 누리는 기쁨도, 안고 있는 고민도 다르다. 지나간 세대는 빠른 변화에 ‘세상 좋아졌다.’ 싶다가도 ‘빈곤 속 풍요’의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젊은 세대는 '풍요 속 빈곤'의 오늘을 누리며 동시에 고뇌한다. 타인의 존재를 느낀다. 커피 향을 타고 낯선 이들의 즐거움과 시름이 흐른다. 다른 이의 삶을 짐작하고 헤아려본다.

     

예쁜 카페에 앉아 음악과 커피 향에 취하다 보면 초라한 삶도 우아하고 향긋하게 조율되는 듯하다. 가슴속 거친 숨도 평온하게 잦아든다. 고운 정서 문화를 비교적 싼 값에 누구라도 함께 누릴 수 있어 더욱 좋다.     


누군가는 커피 문화를 즐기는 대중을 향해 상업적 전략에 휘둘리는 몰개성 취향이라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남들 좋다고 하는 건 나도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 기질의 우리는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호기심은 진화를 거듭한다. 독서나 패션, 예술, 건강 등 새로운 문화를 파생하고 즐긴다. 잠들지 않고 끊임없이 꿈틀대며 긍정성을 끌어내어 내면화한다. 그 역동성에 동조하는 것이 즐겁다.


요즘은 코로나 방역은 물론 경제, 문화예술,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가 세계를 이끌고 있다. 우리의 선택을 믿어도 될 때다. 우리 색을 입힌 멋진 문화로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자기비하가 아닌 자부심의 이름으로 진정한 '된장'임을 자처하는 건 어떨까? 



열나고 기침을 해서 며칠째 두문불출 집에 갇혔다. 즐거운 나들이를 손꼽아 기다리다 못해 생뚱맞게 된장녀를 소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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