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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07. 2020

미니멀리즘 따라하기

이불에 얼굴을 묻으면.


미니멀리즘 열풍은 내 생활에도 작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집안을 휘휘 둘러보며 쓸모없는 버릴 거리를 찾아내는 것은 가끔 하는 대청소의 중요한 절차가 되었다.  그 결과 자질구레한 옷가지나 책, 소품들은 물론 크게 자리했던 가구들이 퇴장하고 나니 여백의 공간이 풍성해졌다. 나는 빈 공간이 주는 가능성과 상상 속에서 자주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도 “좀 신중할 걸...” 하는 후회가 들 때가 있다. 책상 앞에 앉을 일이 많아진 지금, 한 때 거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무겁고 고집스럽게만 보였던 고풍스러운 좌탁을 치워버린 일이 그렇다.  이제 그 좌탁은 친지에게 보내져서 그 댁 어르신의 손길을 받으며 기품있게 자태를 빛내고 있다. 좌탁이 제 주인을 만났음에 위안 삼을 수밖에.


 버려지는 것들은 낡거나 고장 나서 쓸모없어진 것들도 많지만, 새 물건임에도 이 집에 들어와 제 역할을 못 찾고 겉돌다 방치되는 것들도 많다.

미니멀리즘 시류에 덩달아 뛰어든 신중치 못한 주인 탓에, 함께 하던 물건들이 집 밖으로 마구 퇴출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건재를 자랑하는 것도 있다. 바로 지금 내 무릎을 덮고 있는 낡은 이불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나는 닳고 해진 이 이불을 늘 끼고 산다.

 20대 젊은 시절 첫 직장에서 명절날 기념품으로 받은 볼품없는 이불 세트는 나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렇게 시시한 인연으로 시작되어 20여 년을 엎치락뒤치락 부대끼며 내 삶과 함께 해왔다.


누추한 월세방의 가난한 부부를 덮어주는 역할로 시작해서, 자라는 아이들이 오줌싸개이던 시절의 수난도 견뎌야 했고, 유독 소화기가 약했던 큰아이의 토물받이로도 쓰였다. 함부로 다뤄지고, 거친 바닥에서 아끼지 않고 마구 쓰여진 내 이불은, 이제 촌스러운 무늬에 색이 바래고 낡은 채, 모서리도 뜯어진 상태가 되었다.

기쁠 때, 슬플 때, 화날 때 우리는 여기에 얼굴을 묻고 웃고 울었을 것이다. 천덕꾸러기였던 이불은, 오래되어 풀썩 주저앉은 부피에 닳고 닳아 부들부들해진 익숙한 촉감으로, 어느새 다 큰 애들도 서로 탐내는 귀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채워주지 못한 아이들의 정서적인 허기를 달래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던 모양이다.

이런 이유로, 이사 때마다 퇴출품목 1순위로 지목되어 가구 보호 용도나 바닥 끌림 방지 역할을 마지막으로, 버려질 위기에서 거듭 구제되곤 했다.

 돌고 돌아 이제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된 이불은 나에게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
“ 네 맘 다 알아.”

말을 건네듯 따스한 온기로 나를 감싸고, 위로가 되어 준다. 이불자락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면 달콤짭조름한 향이 지난 날 우리의 희노애락을 말해 주는 듯 하다. 때론 행복했고 불안했고 슬프고 기쁘고 막막했던 그 모든 순간들을 담고 있는 내 이불이 살아있는 벗처럼 든든하다.

 상업주의의 숨은 얼굴이기도 하다는 미니멀리즘 열풍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사람 간의 만남과도 같다.
즉, 오래도록 함께할 물건과 신중하게 만나고,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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