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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Oct 18. 2023

밤을 위한 노란 티스푼

생밤을 한 시간 동안 물에 불린 후 열십자로 칼집을 내어 이십 분을 찌고 그대로 뚜껑을 열지 않은 채 십 분을 더 방치하며 뜸을 들인다. 얼음물에 담갔다 꺼낸 밤의 껍질을 손으로 까면 슥슥, 아니 금방 까진다고 했는데 왜 안 되지?




유튜브와 SNS에서 본 대로 밤을 쪘지만 껍질이 생각보다 쉽게 까지지 않는다. 결국 칼집을 낼 때 썼던 과도로 겉껍질을 거칠게 벗기고 속껍질도 칼끝을 빈틈에 밀어 넣으며 벗겨낸다. 물에 불려 찐 뒤 뜸을 들이고 얼음물에 담근 것이 전혀 도움이 안 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벗겨지는 것도 아니라 기분이 언짢아졌다. 칼을 든 손은 벌게지고 손톱 끝은 시커멓고, 아이는 ‘밤은 딱 질색이야!’하며 손사래 치는데 오직 나 먹자고 이 고생을 하는 게 후회된다.


그렇지만 반질반질하게 까진 밤 한 알을 입안에 쏙 집어넣자 포근포근하게 씹히는 식감에, 은은하게 번지는 단맛까지 더해져 좀 전까지의 언짢음은 어디 가고 기분이 좋아진다. 한 알, 또 한 알을 집어먹고 나니 어느새 빈 접시만 덩그러니 남아 어쩔 수 없이  다시 과도를 집어 들어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까는 동안에는 손끝에 힘을 주느라 덩달아 표정마저 굳지만 먹을 때는 얼굴 근육도 느슨해진다. 껍질은 잘 까지지 않지만 찌고 난 후 방치해 둔 덕분에 구석구석 안 익은 곳이 없다. 밤고구마도 맛있지만 포근한 식감은 진짜 밤을 이기지 못한다. 단맛은 고구마 쪽이 더 강하지만 밤은 너무 달지 않아 딱 좋다. 씹으면 씹을수록 밤향과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 이것은 가을의 맛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반으로 잘라주면 수저로 퍼서 먹었다. 아니 퍼먹으라고 줬지만 퍼먹지 않고 긁어먹었다. 수저로 겉면을 얇게 긁어내 입안에 넣으면 마치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듯한 식감을 즐겼다. 다른 수저도 아닌 노란색 손잡이의 티스푼이어야만 가능했던 일이다. 수저의 크기가 밤에 쏙 들어가기 알맞고 끝이 좁고 얇아 밤을 얇게 긁어낼 수 있었다. 이후 커가면서 다른 수저로도 밤을 먹을 일이 많았지만 도무지 예전처럼 얇게는 긁어낼 수가 없었는데 그건 섬세하게 긁어내기엔 수저의 크기가 크거나 두꺼워서였다. 해녀들도 성게 알을 팔 땐 얇은 수저를 선호한다고 하던데 뭐든 파내는 일에는 얇은 게 제격인 걸까.


반으로 잘린 밤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살짝 힘을 주어 긁어내면 밤이 물결처럼 올록볼록하게 접히며 수저 위로 올라오는데 꽃잎 같기도 하고 물결같기도 한 그 밤을 입에 집어 넣으면 부드럽게 무너지는 느낌이 마치 혀 위에서 밤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어릴 때는 맛보다 그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밤을 좋아했다. 군밤보다는 찌거나 삶은 밤을 더 좋아하는 것도 부드럽기 때문인데 밤 특유의 포근과 포슬 사이의 느낌은 따스하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더울 때보다는 추울 때 더 생각난다.


밤 팔백 그램을 거의 혼자 독식하고 빵집에서 산 밤데니쉬도 먹었지만 여전히 밤에 대한 맛의 욕구는 충족이 되지 않아 며칠 후 다시 밤을 주문한다. 이전보다 조금 더 불리고 찐 후 충분히 뜸도 들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러나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더 뻑뻑하게 구는 밤 껍데기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밤을 거침없이 이등분하기 시작한다. 뭐 어때. 집에 있는 차 수저 중 가장 얇은 것을 꺼내 윗부분부터 조심스레 긁어나가기 시작한다. 작은 수저 위에 올라간 밤은 어른이 된 내 한 입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지금 가장 그리운 건 밤의 맛도, 노란 수저도 아닌 가을이면 엄마가 잘라준 밤을 파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몰라했던 어린 시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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