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ove Journa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 Jan 13. 2020

서로의 꽃이 된다는 것

시간이 흐를수록 모호해지는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위 문장은 매번 회자되는 시의 구절이다. 바로 김춘수 시인의 '꽃'. 우리는 누구에게 늘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사랑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대화의 물줄기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갈 때가 많다. 그때마다 사랑의 유형은 참 다양하다고 느낀다. 서로 간에 전기를 느끼고 이끌리는 찌릿한 감정으로 시작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사랑도 있다. 사랑에 대해서는 책으로도 수없이 기술되었고, 모두에게 각자의 철학이 있겠으나 나에게는 알면 알수록 더 희미해지는 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정의다.


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처음 사랑 비스무리한, 이끌리는 감정을 느낀 것은 겨우 여섯 살이었다. 그 어릴 때부터 내 기질은 정해져 있었나 보다. 겉으로는 밝고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속마음을 겉으로 표현하는 게 서투른. 구름 낀 것처럼 흐릿한 기억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어떤 곳에서도 그 아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 눈동자는 그를 따라가기 바빴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생일이 되면 의자에 앉혀놓고 친구들이 와서 볼 뽀뽀를 하게 했다. 신기한 것은 내 생일에 그 아이의 얼굴이 내 볼로 다가올 때의 화끈거림까지 생생하다는 것.


이는 찌릿한 감정이었다. 그 이후로도 학창 시절 내내 나는 그러한 이끌리는 감정만으로 사랑을 정의했다. 긴밀히 연결되는 걸 피하기도 했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나 중고등학생 때에도 나는 이끌리는 사람을 그저 눈에 담는 것으로 충분해하곤 했다.


이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경험했다. 벚꽃이 피어나는 새내기의 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교수님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와 만날 시간을 기다리는 강의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창문 밖에는 흰 벚꽃잎이 하나의 영화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강의 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 그저 끝난 후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와 만나기로 한 거리는 늘 아름다웠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햇살은 반짝이며 내려왔다. 사람들이 번잡하게 지나다니는 거리였음에도 오직 그의 모습만이 색을 입혀놓은 것처럼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마침내 서로를 확인하고 환하게 웃는 그 순간이 온통 벚꽃처럼 화사하기만 했다. 어떻게 그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멈춘 듯, 오직 이 세상에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한 그 벅찬 감정을 말이다.


그는 분명 완벽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한 단점을 자주 찾곤 했다. 우스갯소리로 놀리기도 하고 고치라고 말하며 상처를 주기도 했다. 연애를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그 잡다한 사랑의 기술들이나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존중해야 하는 기본적인 사랑의 태도를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서로에게 실수를 반복했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했으며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감정들을 경험했다. 화내고 웃고, 울고 실망하다가 다시 사랑했다. 정말이지 신기했던 것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서로가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관계에 대한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작은 실망과 잦은 다툼이 쌓여 결국 태풍처럼 큰 싸움을 하고 돌아섰을 때, 우리는 드디어 떨어져 있게 되었다. 매일을 함께하던 우리에게 그 시간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기만 했다.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다시 붙고 싶어 하는 N 극과 S 극이었지만 타이밍을 매번 놓쳤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몇 차례 느끼고는,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시 나는 그가 나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것은 그냥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방적인 감정이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의 황홀함을 봤고, 끝의 처참함도 경험했다. 황홀함을 쫓아 사랑을 원했지만 끝의 처참함을 알기에 철저하게 끝을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음 사랑부터는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내 마음의 흠집을 내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사랑의 벚꽃 따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히 편안한 관계, 서로의 안부를 매 순간 묻고 규칙적으로 만남을 갖는. 이전의 연인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지만 마음의 동요는 전혀 없었다.


아마 상대방에게는 좋지 않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최선이고 진심이었던 그에게 상대방은 조화와 같은 사랑을 주고 있었으니. 그걸 마음으로 알기에 미안함에 나는 그와의 관계를 쉬이 끊지 못했다. 죽은 듯한 사랑은 몇 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날카로운 비수를 그의 마음에 꽂은 후에야 우리는 관계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전의 사랑이 서로에게 뜨거운 열정과 동시에 때로는 아픈 상처를 주는 붉은 장미와 같은 관계였다면, 후자는 한쪽이 죽어있는 조화와 같은 관계였다. 무엇이 더 나았느냐고 하면 고민하지 않고 전자를 고르겠다.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였던 민낯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랄까. 그때가 살아있는 마음속 감정을 가장 크게 마주했던 시기일 테다.






여전히 나는 사랑이 어렵다. 아주 어렸을 때 느꼈던 이끌림의 감정으로 만나, 비록 화려하진 않을지라도 서로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며 한결같이 안아줄 수 있는 편안한 사랑이 있을까. 있다면 이건 그 어떤 복권 당첨보다 큰 행운이 아닐까. 서로가 동시에 이끌리는 것도 행운이라던데, 그에 더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안아줄 수 있는 관계라면 말 다 했지 않나. 그 어려운 확률을 앎에도 나는 늘 그 들꽃과 같은 관계를 기대하고만 있다.


사랑의 정의는 모르겠다. 그저 세상이 밤하늘이라면, 수없이 펼쳐진 별들 속에서 나에게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를 찾기를 바라고 있다. 유일무이한 보석과 같은 그 별은 나머지 별들을 무색게 할 테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우리는 늘 누군가의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가서 특별한 무언가가 되는 것. 서로의 꽃이 될 수 있는 그 진한 연결을 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정의에 대한 토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