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으시죠?
도서관 카페에서 바리스타 봉사를 시작하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 이곳의 공기는 바깥세상보다 반 옥타브쯤 낮게 흐른다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책을 들고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커피를 주문한다.
어쩌면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기서만큼은 나 역시 특별한 일을 기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 샷을 내리며 비우는 마음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갈색 줄기를 보고 있으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템핑을 하고 샷을 뽑고 우유 거품을 내는 반복적인 행위. 이 루틴 속에는 변수가 없다. 원두의 굵기와 물의 온도만 일정하다면 커피는 언제나 배신하지 않고 똑같은 맛을 내어준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누르면 나오는 결과물을 마주한다는 건 지친 어른에게 주는 가장 정직한 위로다.
2. 오늘의 운세보다 중요한 기계의 안녕
예전에는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보며 행운의 컬러나 귀인을 찾곤 했다. 하지만 요즘 도서관 카페로 출근하는 나의 최대 관심사는 따로 있다.
제발, 제빙기가 얼음을 꽉꽉 채워두었기를.
부디, 실크처럼 부드러운 거품이 만드어지기를.
그리고, 손님들이 "맛있네요"라는 말조차 생략할 만큼 조용히 책에 몰입해주기를.
그저 주문서가 밀리지 않고, 우유 스팀이 고운 입자로 잘 나와 아무 사고 없이 마감 시계가 다가오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최적의 하루다.
3. 무소식이 희소식
도서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쫓느라 바빠 보인다. 하지만 카페 안의 사람들은 멈춰 있다. 누군가는 시험 합격을 위해. 누군가는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누군가는 그저 갈 곳이 없어서 이곳에 앉아 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대단한 정점을 찍는 플러스(+)가 아니라 상처받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제로(0)의 상태라는 것을.
"별일 없으시죠?"
단골손님에게 건네는 이 무심한 인사가 사실은 얼마나 지극한 축복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별일이 없다는 건 적어도 오늘 하루는 우리가 무사히 지켜내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도 나는 앞치마를 두르며 기도한다.
커피 찌꺼기를 비우는 일만큼이나 내 마음의 욕심도 가볍게 비워지기를.
화려한 라테 아트보다는 쏟아지지 않는 안정적인 커피 한 잔처럼 내 하루도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기를.
"커피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