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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Issue Nov 09. 2020

태아보험이란 부적 한 장.

  정미소에서 갓 도정한 쌀이라며 쌀 한 포대를 엄마가 주고 갔다. 쌀 있다고 괜찮다 해도 마트에서 파는 쌀이랑 다르다며 막무가내로 가져다준다. 이렇게 엄마한테 받고 있는 건 쌀 말고도 엄청나다. 우리 엄마는 날이 더워지면 포도, 수박, 참외를, 날이 추워지면 딸기를 양손에 담기 힘들 만큼 챙겨준다. 밥 한 끼 먹으러 갔다가도 김치며 밑반찬을 한가득 받아오기 일쑤다. 당연히 이젠 어른이겠거니 생각하고 살다가도 이렇게 엄마가 주는 걸 넙죽넙죽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직은 엄마 그늘 아래 있구나를 다시 실감한다.


  나의 일상 여기저기 엄마의 흔적이 많은 이유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 집에서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누구 못지않게 자식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는 엄마의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직도 내가 어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엄마의 그늘을 크게 느끼는 부분은 다름 아닌 보험이다. 부자가 아니면 보험은 최대한 꼼꼼해야 한다는 엄마의 신념 아닌 신념 덕분에 우리 가족은 보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넉넉하게 갖고 있었다. 그런 엄마 덕분에 부끄럽게도 난 아직까지 내 손으로 제대로 된 보험가입 한 번을 안 하고 살았다. 해봐야 공항에서 10분 만에 뚝딱 하는 여행자 보험이 전부였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챙겨준 보험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샘이다.




  보험은 1도 모르는 내가 이젠 보험을 알아야만 할 때가 됐다. 바로 아내 배 속에 있는 아가를 위한 태아보험 가입 때문이다. 사실 임신 중 태아보험을 가입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착실한 아내가 태아보험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고 말해줘야 알게 됐다. 

  처음엔 태아보험이 태아와 신생아, 아동기 시절을 위한 보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암,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 등 성인보험 보장내역과도 똑같고 보장도 30세, 90세까지 다 되는 그냥 일반 보험과 똑같은 보험이었다. 다만 태아 시절, 어린 시절 보장받을 수 있는 몇 가지 보장내역들과 가입시기 때문에 태아보험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 기본적인 것도 모르던 날 보더니 아내는 배를 어루만지며, 배 속의 아가에게 저런 아빠를 믿고 널 낳아도 되는 거냐고 날 흘겨본다. 내가 잘한 것도 없지만 쓸데없이 보험 이름을 태아보험이라고 지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 보험회사가 야속하다.


  태아보험이 어떤 건지 아는 것이 탐색전에 불과했다. 탐색전이 끝나자 구체적인 보험내용을 설계를 하는 본 게임을 해야 했다. 골절, 상해, 화상부터 시작한 갖가지 항목들에 보장금액을 최대 얼마로 할지, 보장기간은 몇 년으로 할지 하나하나 선택을 해야 했다. 보험내용들이 어렴풋이 아는 내용이라 해도 A4 10장 가까이 되는 양의 약관을 다 읽고 따져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앞에도 말했듯이 이전에는 그냥 엄마가 들어준 보험을 그대로 받아썼기에 보험 약관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거다.


  다행히 나 같은 보험 초보자를 위한 전문가들의 조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는 보험설계사나 전문가들이 태아보험 가입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정보들을 찾아봐도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오히려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보험설계사들 마다 추천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어떤 전문가가 꼭 필요한 보장내역이라며 반드시 챙기라는 걸 다른 전문가는 굳이 필요 없다며 과감하게 딱 잘라버리고 했다. 이렇게 추천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유튜브나 블로그 말을 듣기보다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솔직히 돈만 많다면 보험료 많이 내더라도 모든 보장을 빵빵하게 설정해 놓으면 속 편할 텐데,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 우리 부부는 생활비를 고려해서 아기보험으로 쓸 수 있는 부담되지 않을 만큼의 한 달 보험료를 미리 정해놓고 그 금액 안에서 최대한 꼼꼼하게 보험내용들을 채워 넣었다. 

  암 보장이 커지면 심혈관질환 보장은 작아지고, 심혈관질환 보장이 커지면 또 뇌혈관질환 보장이 작아지는 상황. 하나를 채우면 다른 하나가 비는 상황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먼저 차근차근 채워가면서 우리 부부 나름대로 알차게 보험을 설계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서 태아보험을 가입했다. 가입하고 집에 오던 날 어려운 숙제 하나 끝낸 듯이 어찌나 그렇게 홀가분하던지.




  사실 보험도 대부분 아내가 했다. 옆에서 도와줄게, 내가 할게 말만 하면서 얼렁뚱땅 구경만 한 게 나였다. 아내에게 혼이 나기도 했지만, 보험 약관 한 줄 한 줄 읽기가 어찌나 싫던지. 차라리 수학 문제를 풀라면 풀지, 보험 약관은 죽어도 못 읽겠는 걸 어쩌겠는가.

   

  보험을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아내는 보험은 부적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험을 들어놓으면 가입한 보험에 해당되는 병이나 사고는 안 일어난단다. 보험비 아까워하지 말고, 또 보험 보장받을 생각도 할 필요 없단다. 그 보험에 들면 약관에 적힌 그 많은 질병들이, 사고들이 안 일어나게 될 거라고. 그러면 된 거라고.


  아내의 표현이 너무 적절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보험료야 안 빠지고 꼬박꼬박 낼 테니까 앞으로는 보험회사랑 연락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살면서 부적을 써 본 적은 없다. 다만, 얼마 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부적을 쓰듯이 우리 아가의 태아보험을 가입했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부적을 쓰는 걸까?


  이번에 마련한 태아보험이라는 부적 한 장이 왠지 효력이 좋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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