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아빠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구입한 물건은 블랙박스와 종합비타민제였다. 남들에게도 다 있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당시 그 두 상품을 구매할 때는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내 나이는 서른다섯이다. 첫 아이와의 나이 차이가 서른네 살. 시간이 흘러 내가 환갑이 됐을 때, 우리 아이는 대학교를 갓 졸업할까 말까 하고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난 내가 늦게 아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가 환갑일 때, 나와 동생은 몇 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난 결혼도 한 상태였다. 아들 부부와 딸이 환갑을 기념해 드린 용돈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오셨었다. 엄마는 아직 환갑이 되려면 몇 2년은 있어야 한다. 작년에는 여동생도 결혼을 해서 엄마가 환갑 땐 아들, 딸, 며느리에 더해 사위까지 함께할 것이다. 거기에 한참 재롱을 부릴 손자까지 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늦게 아빠가 됐음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절대로 건강하자였다. 애가 차근차근 성장하는 모습을 오래오래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려면 건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굳이 우리 엄마, 아빠가 환갑일 때 나와 동생은 몇 살이었는지를 비교해가면서 먼 미래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당장 다음 달이면 만날 아이가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내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내 건강이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 아니겠는가. 누가 봐도 당연한 소리다.
그런 마음에서 산 물건이 블랙박스와 종합비타민제였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를 예방하는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져 보려는 마음에서. 다른 건 몰라도 건강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두 물건을 냉큼 구매했던 것이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준비해야 될 게 많은 것 같다. 애정과 관심, 흔들림 없는 육아 가치관, 아이의 성장 시기에 알맞은 지식 등.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이런 추상적인 것,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거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것들에도 눈이 간다. 대표적인 게 앞에 말한 건강이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좋은 아빠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아주 더 많은 진담을 담아서 돈이라고 답하고 싶다. 속물적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이보다 더 명쾌한 정답이 있을까?
자, 그럼 난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돈을 잘 모으고 있는가?
갑자기 입에서 쓴 맛이 나고, 헛웃음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공무원 아빠인 내가 우리 아이에게 남부럽지 않게 이것저것 왕창왕창 채워줄 만큼 경제력을 갖추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의사를 하고 있는 친한 형과 각자 벌이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봐보니까, 10년 동안 차곡차곡 호봉을 쌓아서 받은 내 월급이 병원에서 일한 지 1년 된 의사 월급보다 적었다. 적어도 좀 적은 게 아니었다. 맨 앞자리 숫자가 다를 정도로 적었던 건 참신한 충격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직업마다 하는 일이 다르고, 근무하는 시간이 다르다. 그러니 단순히 월급 액수로 뭔가를 비교하는 건 옳지 못하다. 내가 지나치게 박봉이라는 것도 아니고, 의사가 지나치게 돈을 많이 번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경제력 그 자체로만 봤을 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내 상황에서도 아이를 키우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믿는다. 다만, 솔직히 돈 많은 게 싫은 사람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조금 더 여유로운 상황이라면 우리 아이에게 이것저것 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겠는가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공무원 신분이라 겸업도 안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재테크인데 그마저도 능력이 없다. 선풍적인 주식 열풍에 홀려 큰 희망을 안고 나 역시 주식을 시작해봤다. 용돈 야금야금 모아가면서 주식을 시작한 지 일 년 채 되지 않은 주린이. 다들 파티가 열리는 상승장이라는데도 나에겐 그저 남 얘기일 뿐이었다.
아직까진 애가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다 팡팡 해주는 아빠가 되긴 현실적으로는 힘들 것 같다. 아쉽긴 해도 또 생각해보면 월급이라도 제때제때 받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어찌 됐든 난 플렉스보다는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챙겨주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
참, 아이가 생기면 맨 먼저 수영도 배우려고 했었다. 다른 운동에는 다 자신이 있는데, 수영이라고는 전혀 못하는 맥주병이다. 차라리 병은 물에 뜨기라도 하는 것 같은데, 그 쉽다는 물에 뜨기 조차 나는 못한다. 가족과 같이 물놀이 한 번은 갈 텐데 그럴 때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 아이가 생기자마자 꼭 수영을 배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그저 생각뿐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을 가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저 멀리 밀어 놨을 뿐이다.
최근엔 적은 머리숱까지 걱정이다. 가늘고 숱이 적은 머리카락은 원래 내가 가진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심각한 탈모까진 아니었지만, 늦은 저녁이면 한 번씩 거울에 비친 힘없이 축 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휑한 두피는 늘 걱정이었다. 아내는 내가 머리카락 걱정을 하고 있으면 나중에 대머리 됐다고 이혼하자고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괜히 이것저것 해가면서 발버둥 치지 말고 그냥 머리를 밀고 다니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같이 살아주는 아내가 괜찮다니 괜찮다 싶었다가도 곧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더 큰 걱정이 되어갔다.
유치원이나 학교 입학식, 졸업식에도 가려면 아빠가 멋있어 보여야 할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머리가 비어있으면 어쩐단 말인가. 아무리 아빠래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야 애가 좋아할 텐데 말이다.
지인 중 덩치가 좀 있으신 분이 있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왜 뚱뚱해하고 물어보았단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외모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있구나 싶어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했다고 한다.
배가 좀 나온 게, 머리숱이 좀 적은 게 잘못은 아니다. 제 멋에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다만, 좋은 외모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보니 마냥 이걸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내 아이가 커서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조금이라도 멋진 아빠이고 싶을 뿐이다. 한 살 두 살 더 먹어서도 슈트핏 좋은 늘씬한 몸매에, 깔끔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아빠이면 얼마 좋을까.
극단적으로는 이번 생엔 좀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디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서 아빠가 갖춰야 할 것들이 생각해봤다. 여유로운 경제력,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수영실력, 댄디한 스타일까지. 근데 웃기게도 생각만 하지 뭐 하나 바뀐 건 없다. 월급은 여전하고, 수영은 코로나 핑계로 배우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내가 자라라고 해서 자랐을 리도 없고 말이다. 지난 10개월 동안 무슨 준비를 한 거지? 그나마 착실히 한 일이라고, 종합비타민을 사면서부터 꾸준히 비타민, 오메가 3, 밀크씨슬 같은 영양제를 챙겨 먹는 정도다. 이거라도 해서 다행인 건가.
괜히 아쉬움만 하나 둘 남는 생각들은 좀 제쳐두고 다르게 생각해본다. 세상에 좋은 아빠들이 다 만수르 같은 부자이거나 박태환 선수 같은 수영실력을 가진 것도, 원빈이나 강동원 같은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닐 테다.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 좀 없어도 나름의 방식으로 좋은 아빠들이지 않겠는가.
당장 내 아빠만 해도 그렇다. 재벌도 아니고, 일하느라고 바빠서 같이 수영을 해 본 기억도 없다. 내가 아빠 유전자를 받았으니, 머리숱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우리 아빠는 내게 충분히 멋지고 좋은 아빠였다. 다시 태어나도 아빠 아들 하라 하면 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충분히 좋을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긴다. 뭐 이것저것 다 갖춘 아빠면 당연히 좋겠지. 그러니까 짬짬이 주식 소식도 찾아보고, 시간 나면 수영도 배울 테고, 기회 되면 검은 콩이나 어성초도 먹어볼 것이다. 그런데 또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 아이에겐 둘도 없는 좋은 아빠가 되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