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지난겨울, 아빠는 딸기를 많이도 샀다. 이유는 간단하다. 임신한 며느리가 딸기를 많이 좋아하니까. 아버님이 사다주신 딸기는 항상 큼직하고 맛있다며 아내는 늘 좋아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게 먹으면 질릴 만도 한데, 아내가 겨우내 질리지도 않고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아빠가 사다준 딸기가 맛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 엄마, 아빠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때 일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작은 봉투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내는 아내의 모습을 보더니 아빠는 용돈을 주는 거냐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한바탕 새 가족을 환영하는 축하가 끝나고 엄마는 아빠의 용돈 타령을 잊지 않고 다시 꺼내 놀렸다. 손주가 태어난다는데 용돈 타령하는 웃긴 할아버지라고 말이다.
봉투에서 슬며시 꺼내는 손바닥만 한 초음파 사진을 알아차리는 센스는 없었지만, 아빠는 곧 만날 우리 아기의 출산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었다. 엄마네 집에 가면 부엌 한쪽엔 언제나 아빠가 사 온 딸기가 담긴 스티로폼 상자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우리 집에 올 때도 아빠는 늘 한 손에 딸기 상자를 들고 오셨다. 지난겨울 우리 가족이 맛있게 먹었던 많은 딸기는 손주를 환영하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곧 손주를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빠는 시간이 잘 가는 듯했다. 작년 여름부터, 그러니까 임신 소식을 알리고 나서부터 아빠는 시간이 잘 간다는 말을 종종 했다. 잘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좋으셨던 모양이다.
아내의 뱃속에서 아기가 쑥쑥 크는 동안, 아빠의 시간은 잘 간다는데 나의 시간은 어땠을까?
어젠 아내의 임신 37주 0일이었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은 이제 다음 주면 아기가 태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셨다. 다음 주란 단어가 머릿속에 박히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음 주. 물론 예정일은 아직까지 좀 남아있고 다음 주에 무조건 아기가 태어난다는 소리도 아니지만, 정말 얼마 안 있으면 아기를 만나겠구나 생각하니 살짝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시간은 정말 빨리 가는 것 같다.
벌써부터 아기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날이 있으면 별다른 일이 없어도 정신 팔릴 무언가가 있으니까 시간이 잘 갈지도. 물론 얼른 아기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시간이 잘 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는 촉박해진 마음 때문에 시간이 잘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출산이 한 달 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준비할 건 많은데 준비되지 않을 것이 몇몇 있어서는 아닐는지. 요즘은 출산할 때 준비물이나 준비사항을 체크하는 중이다. 첫 아이다 보니 인생 선배들한테 이런저런 준비할 것들 얘기도 듣고, 출산과 육아 서적도 찾아보고 있다. 그래도 아직 준비 안 돼있는 게 많다. 아직은 아기 내의도 부족하고 배냇저고리도 더 필요하다. 체온계도 있어야 하고, 젖병소독기는 어떤 걸 사야 할 까 아직 고민 중이다. 아직 체크표시가 되지 않은 몇몇 리스트들 때문에 괜스레 마음만 급해져서 시간이 잘 가는 건 아닌가 싶다.
준비물도 준비물인데, 더 결정적인 건 마음가짐인 것 같기도 하다.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 당연히 기쁘지만 그만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큰 일을 앞두고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하다 보니 마음이 급해지고, 그런 마음에 시간이 빨리 가게 느껴지는 건 아닐지.
아내의 배 속에 아기가 있는 동안 늘 시간이 잘 흘렀던 건 아니었다.
배아 이식을 하고 난 후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일주일은 정말 시간이 안 갔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하루가 일 년 같은 시기였다. 임신을 알고 나서도 시간은 더디게 가긴 마차가지였다. 보통 안정기라는 임신 16주 차까지는 시간이 어찌나 그렇게 안 가던지.
혹시라도 아기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작은 일 하나에도 걱정을 하며 지냈었다. 아내와 난 병원 진료 날짜가 아닌데도 몇 번을 산부인과에 더 갔었다. 아내의 배가 조금만 아파도, 아내의 몸에 조금의 이상만 있어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병원에 달려갔다. 막상 병원에 가서 보면 의사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다 하셨다. 작은 일에 너무 예민했던 시기였나 보다.
임신 초창기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던 만큼 불안감도 컸던 시기였나 보다. 그 불안감이 시간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고, 그래서 시간이 그리 안 갔나 보다.
지금은 시간이 이렇게나 잘 가는데, 그땐 왜 그렇게도 시간이 안 갔는지.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느껴지는 게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땐 시간이 너무 안 가서 걱정이었고, 요새는 시간이 너무 잘 가서 걱정이란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니 괜히 안심이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또 어떻게 될까? 시간이 잘 갈까? 아니면 안 갈까?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차라리 뱃속에 있을 때가 낫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또 막상 태어나고 나면 제 새끼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아기가 통잠을 잘 때까진 정말 힘들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잔뜩 긴장감이 들기도 하는데, 또 얼른 얼굴도 보고, 안아보고 싶기도 하다.
시간이 좀 늦게 가면 어떻고, 일찍 가면 어떻겠는가.
그저 내 할 일 착실하게 하면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역할만 좀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