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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Issue Apr 11. 2021

누구와 목욕탕을 갈까요?

  엄마는 손주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딸이었으면 좋겠어?


  괜히 한 번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뭐든 상관없다셨다. 엄마의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는 말은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손자가 됐든, 손녀가 됐든 온 사랑을 다 줄 수 있단 말이었다. 

  아들이 결혼한 지 4년이 넘어서야 그렇게 듣고 싶던 손주 소식을 들은 엄마 입장에서 손주의 성별이 중요한 게 절대 아니었다. 딸이던 아들이던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기면 하면 충분하고 했다.

  나와 아내도 엄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애가 닳게 원했던 아이였다. 아이가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기에 굳이 아들이나 딸 중 하나를 콕 집어 바랄 것도 없었다. 우리 부부에게 배 속 아기는 이미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축복이었기 때문에 성별이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또, 사람 심리가 뭐든 상관이 없는 것과 궁금한 것은 별개인가 보다. 정말로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은데 아들일지, 아니면 딸일지는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였을까 괜히 가족들에게 아내 뱃속에 아기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는지, 딸이었으면 좋겠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렇게라도 내가 가진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성격이 시원시원하신 장모님은 원하는 손주의 성별이 뭐냐는 질문에 대번에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장모님은 이번에도 거침없이 딸 셋 키워보니까, 딸 키우기 너무 힘들다고 쿨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옆에서 같이 밥을 먹던 세 딸들의 원성을 샀긴 하셨지만 말이다. 처형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었고, 처제는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도 맨 끝에는 모든 가족들이 아들, 딸 상관없고 건강하게만 나고 자라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이 성별이 전혀 상관이 없다 보니, 이와 관련된 우리 부부는 대화 주제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딸이었으면 좋겠다가 아니었다. 대신에 아들이냐 딸이냐 따라 우리 가족의 모습이 어떤 차이가 있을지를 얘기했었다.


  우선 아들이면 내가 같이 운동을 해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 애가 운동을 할 때쯤 내가 몇 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에 자신이 있으니 잘 놀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내는 나중에는 나랑 아기가 옷도 커플로 입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아빠랑 아들이 커플로 입은 운동복이 그렇게 이뻐 보였단다. 사춘기 무렵, 한참 무뚝뚝할 때 우리에게 말도 안 걸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나중에 커서는 군대도 가야 할 텐데 그 까마득함을 먼저 경험해 본 아빠로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제발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의대나 치대에 가서 군생활을 편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꿈같은 희망사항도 아내와 나는 털어놨다.


  괜히 침대에 누워서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그렇게 행복했었다.


  자, 딸이면 어떻게 될까? 

  아내는 영어로 된 디즈니 OST 곡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시키겠다고 했다.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애니메이션도 접하게 하면서 영어공부도 시키겠다는 다부진 계획이었다. 한 발 더 가서 하늘하늘한 공주 드레스도 이벤트성으로 한 번씩 입혀보겠다고 했다. 우리 집도 딸이 있는 다른 집처럼 미리 엘사 치마 하나 정도는 장만해야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들보다는 딸이 더 나에게 다정다감하진 않을까 하고 흐뭇해하기도 했다. 걱정거리라면 아무래도 치안문제 일 것 같았다. 한 번씩 들었던 흉흉한 사건 사고를 떠올리면 혹시라도 집에 늦게 들어오면 얼마나 전전긍긍할지 벌써 걱정이었다.


  이렇게 보니 참 웃기다.

  이미 나에겐 이런 아들이 하나 있다. 나와 같이 옷을 세트로 맞춰 입고, 주말이면 축구를 하거나 야구장을 다니던 아들. 그러다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니 사춘기가 와서 부모님과 대화도 별로 안 하고 무뚝뚝하지만 누굴 닮았는지 머리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똑똑해서 치대를 간 효자 아들 하나가 말이다.

  또 이런 딸도 하나 있다. 어릴 때부터 디즈니 공주 원피스를 입고 원곡으로 된 디즈니 OST를 부르면서 발랄함과 글로벌 시대에 맞춘 영어실력까지 갖춘 딸이다. 가끔 집에 늦게 들어와서 엄마, 아빠 걱정을 시키곤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애교도 많고 발랄한 둘도 없는 딸이다.


  조금 앞서 갔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해를 말아달라.




  어느 날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말해주었다. 뱃속에 아가가 아빠와 목욕탕을 다닐 것 같다고 말이다. 

  다시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해서 젊었을 때 축구 실력을 갖춰놔야 하나? 참, 운동을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너무 앞서 가진 않도록 하자.


  아들임을 알고 나서 며칠 뒤 아내는 갑자기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고 했다. 두 갈래의 길 앞에서 가지 않은 길을 한참을 바라보면서 아쉬워했다는 시인의 기분을 알 것 같단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막상 배 속 아기가 아들인걸 알고 나니까 딸일 때 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들과 원피스들이 괜히 아쉽다고 한다. 딸이랑 같이 커플 옷을 못 입는 것이 아쉽다는 아내에게 요즘 옷이 여자 옷, 남자 옷이 어디냐고 아들이랑 입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하니 그때서야 아내는 그런가 하고는 실없이 웃는다. 사람 심리가 원래 그런가 보다. 갖지 못하는 거에 대한 관한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나 보다.

  

  묘한 아쉬움도 잠깐 뿐이다. 결국 결론은 항상 태어나줘서 고맙다,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자라다오였다.




  아 참, 아들이라고 하니까 친한 형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충고 하나를 했다.

  나도 너무나 공감되는 충고였다. 아직은 내 말을 들을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없지만 내 아들이 언젠가 꼭 가슴에 꼭 새기길 바라면서 여기에 적어본다.


  아들아! 나중에 커서 스포츠가 좋아진다면,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야구팀과 축구팀이 생기거든 기아 타이거즈와 리버풀은 아니었으면 한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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