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에 MBC에서는 일요일 밤에 ‘성공시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어릴 때였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니 1997년부터 11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방송했다고 한다. 1997년이면 내가 결혼한 해인데 왜 엄마, 아빠, 우리 네 남매가 둘러앉아 시청했다고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성공시대’는 부와 명예 또는 사회적 인정을 획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 우물을 파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거나 남들보다 몇 곱절은 노력하여 타고난 결점을 극복하고 전문가로 우뚝 섰다거나 하는 성공담을 재연과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보여줬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영화감독 임권택, 헤어디자이너 박준, 야구선수 이승엽, 아기공룡 둘리를 탄생시킨 만화가 김수정, 소설가 조정래 님이 기억에 남는다. 제작과정에서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많이 첨가되기도 했겠지만 ‘성공시대’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과 같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위인전을 보는 것 같았다.
“성공시대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의 역할이 참 중요하더라. 아버지가 밀어주고 뒷받침을 잘해줘야 자식이 잘 되는 거야.”
라고 중요한 걸 발견했다는 듯이 엄마는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이미 머리가 굵은 나는 엄마가 책임을 또 아빠한테 미루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이 애써 찾아낸 꿈을 펼치게 도와주기는커녕 미리부터 의지를 무질러 버리는 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그럴싸한 성취지위를 갖기를 원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반복적으로 한 말은 ‘서울대 갈 거 아니면 서울로 대학 갈 생각하지 마라.’였다. 고등학교 1학년 내내 중위권에 머물렀던 내 성적은 2학년이 되고 나서 조금씩 올랐고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본 모의고사에서 썩 괜찮은 점수를 얻었다.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시던 아빠는 본인이 영문과 출신이었음에도 ‘국문과는 굶는 과’라며 반대했다. 아빠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내 성적에 맞춰서 선택할 수 있는 학과 중 전망이 좋은 건 중문학과, 심리학과, 문헌정보학과라고 했다. 중문과는 앞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질 거라는 이유로, 문헌정보학과는 컴퓨터를 배우니까 유망하다고 했다. 또 심리학과는 대학원에 가서 레저를 더 공부하면 직업 선택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셋이나 되고 우리집 형편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순순히 뜻을 꺾고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했다. 심리학과는 동물 실험을 한다는 말을 들어서 내키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물으셨다.
“자두야, 중문과는 왜 싫어?”
“한자를 배우는 게 싫어요.”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하지만 문헌정보학과에서도 고서를 다루기 때문에 한자가 필수인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무지하고 정보도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를 몰랐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대학입학 원서를 접수하기 전에 부모님 면담이 필수였다. 별 기대 없이 학교에 방문했던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한 뒤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로 갈래? 네 실력 정도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해 봐도 좋겠다던데?”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 됐어!”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4, 50분이 걸렸던 터라,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기숙사에는 엄마가 권유해서 들어갔는데 기숙사비는 월 8만 8천 원이었다. 사야 할 참고서가 있거나 학급비를 내야 할 때 교내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했다.
“네가 전화하면 무섭다, 나는. 또 돈을 얼마나 달라고 할까 싶어서.”라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참고서가 3권 필요하면 2권만 샀고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핑계를 대고 학교에 남았다. 그렇게 죄책감 비슷한 기분을 안고 조마조마하게 1년을 보냈는데 서울로 대학을 간다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다.
사실 엄마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보다 남들에게 뭐라고 말할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자 엄마는 그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 했다. 한 번은 엄마가 시내에서 옷을 사주겠다며 계모임에 나를 데려갔다. 시장 안의 허름한 중화요릿집에서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에 둘러싸여 짜장면을 먹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한 분이 “얘가 자두야? 벌써 이렇게 다 컸네.” 하자, 엄마가 “어, 이번에 전북대 들어갔어. 장학생으로.”하고 말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한 번 더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번에 우리 막내 대학 졸업했잖아. 지 언니, 오빠는 셋이 다 서울대 나왔는데 얘만 연세대야. 내가 연세대를 처음 가봤는데 아휴, 학교가 아주 후져.”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 엄마 어쩌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빠는 장점을 칭찬하기보다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이었다. 백 점 만 점에 평균 97점을 받으면 틀린 개수를 콕 집어 말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하자 아나운서는 카메라 테스트를 받으니 방송 쪽에 뜻이 있으면 PD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엄마는 자존감을 대패질하듯 사각사각 갉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대학 때 내가 귀걸이나 목걸이를 사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면 청소를 한다는 명목으로 내 방을 뒤지고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쟤는 무슨 화려~한 귀걸이를 사놨어? 지가 예쁜 줄 알어. 지가 무슨 모델인 줄 알어.”
결혼하고 서울로 온 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집 근처의 법무사 사무실에 취업했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내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얘기했다. 출산 후, 은행 본점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주말마다 아들을 보러 부모님 집에 내려갔다. 엄마는 교회를 다녔는데, 한번은 엄마가 교회에서 돌아오기 전에 옆집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막 보험 영업을 시작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보험가입을 권유하셨다. 내가 계약직이고 급여가 많지 않아서 아직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하자 아주머니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뒤늦게 집에 온 엄마는 상황을 전해 듣고는 노발대발했다.
“아니, 그놈의 여편네는 왜 나도 없는데 오고 난리야. 그리고 너는 계약직이라고 말하면 어떡해? 내가 정직원이라고 했고만.”
내가 사서교사가 된 건 엄마가 돌아가신 뒤의 일이라 조금은 안타깝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큰딸이 선생님이라고 아주 자랑스러워하셨을 테지.
늦은 나이에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무렵, 통화를 하던 중에 아빠가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국어교사로 일할 방법은 없냐?”
‘아빠가 국문과 가는 걸 반대하셨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성격, 체질, 취향 등 뭐 하나 맞는 게 없었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환상의 커플이었던 거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들에게 내가 원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말해왔다. 공부를 척척 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어차피 재민이는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다.
생계를 인질 잡혀서 하기 싫은 일을 했던 때가 있다. 학교에서 업무에 지치고 관계에 짜증 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고.
성공, 그거 꼭 할 필요 있나? 실패해도 멋지게 실패하면 되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대신 나는 사소하고 하찮은 성공을 자주 한다. 요리를 했는데 맛있게 잘됐으면 ‘성공!’ 머리를 했는데 예쁘게 잘 나왔으면 ‘성공!’ 오늘 쓰기로 한 글을 완성했으면 ‘성공!’
그래서 오늘도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