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만나는 아이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남궁증이라는 선배 교사가 있었다. 그 선생님과 나는, 네 명이 근무하는 작은 교무실에서 함께 근무했다. 당시 나이가 50대 중반 정도셨는데, 아이들이 이 선생님 앞에만 오면 그렇게 까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남궁증 선생님이 나를 가장 예뻐한다’고 믿는 것처럼, 까불고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비단 몇 명의 아이가 아니었다. 선생님을 찾아오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믿고 까불었다. 선배 교사의 내공이 대단하셨다. 아, 그때 알았다. 당신이 나를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이 있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도 마음도 자유로이 노닌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꿈도 못 꿀 장면이다.
―서현숙, 『소년을 읽다』 (사계절 2021)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나는 나이 많은 나를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의 없고 경우 없는 사람에게는 딱 선을 긋는 내 지랄 맞은 성격도 좀 걱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보면 중학교 시절의 내가 소환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활달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왈가닥이었지만 사실은 자존감도 낮고 관심과 인정에 목마른 아이였다. 돌이켜 보면 어른에도 아이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하고 위태한 시기를 지독히도 외롭게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신관 4층에 위치해 있어서 일부러 도서관에 오는 아이는 딱 두 부류다. 정말 책을 좋아하거나 사람들로부터 피해 있을 안전한 공간을 찾거나.
아이들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나는 고양이 걸음으로 서가 정리를 하고 가능한 말을 걸지 않았다. 마이쮸를 쓱 건네줄 뿐.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고 학교가 멈췄을 때, 아이들이 진심으로 그리웠다.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 온다면 예전보다 아이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나 보다.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서 만났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서성이는 아이에게는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떤 책 읽을래? 선생님이 찾아줄까?”
처음에는 좀 쭈뼛거리던 아이들이 어느새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책 좀 추천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래? 넌 어떤 책 좋아해? 최근에 읽은 건 뭐야?” 하며 신이 나서 서가로 들어간다.
도덕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책 추천해주시는 거요. 아이들은 존중받는다고 느낀대요."
많은 아이가 얇고도 재미있는 책을 원한다. 그런데 간혹 나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어려운 책을 찾는 아이도 있다. 처음 건우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대출했을 때, 나는 그 애가 그 책을 정말로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다시 도서관에 찾은 건우가 수업시간에 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책을 뺏겼다고 했다. 나는 그러게, 왜 수업시간에 책을 읽느냐고 타박하면서도 내심 기뻤다. 그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건우가 아주 집중해서 책에 빠져있더라고 했다. 그 후로 건우가 책을 반납하면 나는 벌써 다 읽었냐고 물개박수를 치며 다음 책을 추천했다.
“건우야,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 읽어봤어?.”
“건우야, 너 이런 책도 좋아할 것 같아. 이번엔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읽어볼까?”
‘저, 이번엔 뭐 읽을까요?’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방과 후에 찾아와서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예은이가 말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업무가 바쁘셔서 이렇게 대화를 안 해주시거든요.”
나는 발끈해서 “야, 나도 바빠.”하고 대꾸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애들하고 라포를 형성하셨어요?”
“글쎄요. 마이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