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의 무기력한 일상.
퇴사가 마무리되었어도, 인생은 여전히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
시작이 그렇듯, 마무리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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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앞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퇴사일로부터 14일째 되던 날, 재무이사님의 마지막 인사가 담긴 메시지와 함께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그 순간, 마음이 생각보다 더 허전했다.
좋은 사람이라 믿었던 상사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의 배신감.
경력자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업무적 고립 속에서의 퇴사.
하지만 따뜻한 타 부서 사람들 덕분에 떠나는 것이 더 아쉽게 느껴졌다.
"우리 나이에 재취업 쉽지 않으니까, 준비하고 나가."
아침저녁으로 내 자리에 찾아와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던 동료도 있었다.
나도 안다. 매일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취업시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리가 없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퇴사한 회사와 좋은 관계로 남고 싶다.
나중에 근처에 가면 가볍게 들러 인사할 수 있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
첫 직장을 떠난 후, ‘나만의 안식년’이라며 사계절을 소비형 인간으로 살아봤다.
그때 알았다. 제대로 쉬려면 방향이 필요하다는 걸.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 계획 없이 주어진 긴 휴가 앞에서 또다시 무기력에 빠진다.(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매일 아침 5시 40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던 나는 사라졌다.
불면증으로 멍한 상태에서 린스로 샤워를 하다 깜짝 놀랐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금세 무기력에 잠식되었다.
움직이기는커녕, 그냥 누워 있고만 싶다. 하지만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고 있다.
이번이 세 번째 자발적 퇴사.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회사라는 루틴 속에서 일하는 것이 맞는 사람 같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더라도 결국 내게 '일'이라는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퇴사 후 한 달 반 만에 집 앞 산책로를 걸었다.
봄이 와서 그런지,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걷다 보니 금세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첫 직장에서 친했던 동생을 만나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셨다.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공사 중이던 곳에 도서관이 생겼다고 해서 가봤다. 시설이 깔끔하고 좋았다.
며칠 전에는 집 근처 역앞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도 가봤다.
출퇴근길에 지나칠 때마다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곳을 드디어, 가보았다.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음과 바닥이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나름의 매력이었다.
책을 좋아하지만(책수집가), 막상 읽으려 하면 글이 잘 읽히지 않아 늘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한 자리에서 책장을 쭉 넘겼다.
글배우의 『지쳤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거나』.
인스타에서 짧은 글로만 봤던 작가님의 책.
예전에는 호기심도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이제는 먹고 싶은 음식도, 가보고 싶은 곳도 딱히 없다.
잘되는 사람들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본인들이 평범하다고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꾸준함과 노력이 있다.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결국 그들의 성공을 만든다.
나는 살면서 무언가에 간절해 본 적이 있을까?
한동안 무기력에 잠식되었지만, 이제 다시 움직여보려 한다.
아주 작은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의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