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트루데 앤 토흐터에서 / Cafe Trude & Töchter
박물관 무료입장이라니!
비엔나 박물관(Wien Museum) 입구에서 표를 끊으며, 첫 번째 일요일의 특권을 누렸다. 비엔나에서 매달 첫 번째 일요일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이다. 이런 작은 행운을 만나는 즐거움이 여행의 묘미 아닐까.
관람 시간이 길 것 같아 이른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박물관 안에 투르데 앤 토흐터(Cafe Trude & Töchter)라는 카페가 갑자기 눈에 확 들어왔다.
'트루데와 딸들?'
직역하면 그렇다.
이름부터가 어딘가 따뜻한 구석이 있어서, 마치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찻집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카페 '트루데 앤 토흐터'는 상상했던 앤틱 공간과는 달랐다.
두툼한 금속 프레임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30도를 넘는 바깥공기와는 다른 시원함이 밀려왔다. 높은 천장과 큰 창문이 만들어내는 개방감. 따스한 목재와 대리석의 조합이 모던하면서도 세련됐다.
하얀 벽면에 걸린 흑백 사진들이 시선을 끌었다.
여성들의 인물 사진.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 1920-30년대 비엔나 사람들의 표정이 담겨있었다. 초록색 메뉴판을 펼치자 '트루데는 누구인가?'라는 제목 아래 설명이 있었다.
트루데 플라이슈만(Trude Fleischmann).
오스트리아 출신의 자신감 넘치는 젊은 사진작가. 그녀는 1938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 그래서 트루데와 딸들이구나.'
"Lunch or Drink?"
빈자리에 앉을까 망설이는 순간, 블랙 앤 화이트 유니폼을 입은 젊은 종업원이 다가왔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오전 11시. 음료를 마시겠다고 하자, 그는 카페 중앙 테이블 대신 안쪽 벽면의 스툴 쪽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너무 높은 스툴과 좁은 테이블은 여유롭게 앉아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아마 음료만 마시는 손님, 오래 머물지 않는 손님을 위한 자리배정인 듯했다.
비엔나 전통 커피인 멜랑슈(melange)와 치킨 요리를 주문하며 중앙 테이블로 자리 이동을 요청했다. 드디어 적당한 높이의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야 '카페 투르데 앤 토흐터'의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할 준비가 됐다.
블랙으로 마감된 긴 카운터에서 바리스타 한 명이 에스프레소 머신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원두를 갈고, 탬핑하고, 추출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모던한 공간에 블랙 앤 화이트 유니폼마저 세련되게 어울렸다.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창가의 젊은 여성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집중과 여유가 동시에 묻어났다.
급하지 않지만 멈추지도 않는, 그런 리듬.
느긋하게 이어지며 계속되는, 그런 리듬.
다른 테이블의 중년 커플은 전시 안내책자를 보다가 때때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 각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아마도 어떤 생각의 파편들이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주문한 멜랑슈가 나왔다.
멜랑슈는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우유를 넣어 만드는데, 우리에게는 카페라떼로 친숙한 비엔나 전통 커피이다.
너무 기대감이 컸나. 컵 위의 우유 거품이 만들어낸 하트 모양을 보며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한국에서 늘 보던 몇 겹의 멋진 하트에 익숙해서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작은 것들에서도 완벽을 기대하게 되었을까.
라떼 아트가 예쁘지 않으면 실망하고, 커피가 조금만 늦게 나와도 시계를 확인하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마음이 스스로 무력해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는 이곳의 속도에 익숙해지는 게 당연한 일. 천천히 멜랑슈 맛을 음미했다.
브런치 메뉴판의 'Brioche with Fried Chicken'이 궁금했다.
‘Brioche’. 닭튀김과 함께 나오는 무언가란 건데, 모르는 영단어라서 찾아봐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구글 검색과 번역을 하면 되는 세상이니 걱정할 것 없다. 낯선 언어와 하나씩 친해지며 알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찾아가면 되는 것.
'브리오슈. 달걀과 버터, 설탕을 듬뿍 넣어 만든 프랑스의 부드러운 빵.’
이것저것 찾아보는 동안, 종업원이 주문한 요리를 가져왔다. 얇게 튀긴 닭고기 위에 노란색 올랑데즈 소스가 뿌려져 있고, 보랏빛 양배추 샐러드인 코울슬로(coleslaw)가 곁들여져 나왔다.
예상보다 소박했다.
바삭하게 튀겨진 닭고기 한 조각과 레몬, 그리고 작은 샐러드가 전부. 블랙 테이블 위의 하얀 접시와 찻잔이 어우러진 세팅. 도시의 시크함이 느껴지는 단순함이었다.
옆 테이블의 노부부가 작은 소리로 독일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편안함이 배어있었다. 때로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조차 자연스러웠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 핸드폰을 꺼내 들거나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지 않는, 그런 모습.
카페 안은 점점 분주해졌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바리스타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급하지 않았다. 좌석이 많이 채워져도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았다.
나는 슈니첼(한국의 돈가스와 비슷한 요리)처럼 생긴 닭고기를 천천히 먹으며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작은 드라마들을 관찰했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는 사람, 친구와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각자의 시간이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이 공간 안에서는 조화롭게 공존했다.
비엔나 여행 직전까지 나는 늘 바빴다.
하루 일과가 효율적이어야 했고, 생산적이어야 했다. 카페에서도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하거나, 적어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커피의 온도가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햇빛이 테이블 위를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멜랑슈 한 잔을 다 마시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았는데도 시간은 흘러가 있었다. 오히려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풍성해진 것 같았다.
계산을 하며 바리스타에게 "Danke(감사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가 건넨 미소에는 진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손님으로서 돈을 지불하고 떠나는 나에게가 아니라, 잠시나마 이 '트루데'의 공간을 함께 나눈 누군가에게 건네는 그런 미소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일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일지도.
카페를 나서며 뒤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노트북 앞에 앉아있고, 누군가는 새로운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나에게 ‘카페 투르데 앤 토흐터’는
비엔나 미술관 옆에 있는 공간이자,
트루데 플라이슈만이란 여성 사진작가를 떠올리는 공간이며,
무엇보다 천천히 마시는 법을 배운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커피 한 잔이 식는 동안, 비엔나는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