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깨우는 감각들

프로이트 박물관 옆, 카페 센터페에서 / Cafe Sentepe

by 최은희

낮 최고 기온 22도, 오후에 비 소식.


예보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발걸음은 이미 링 슈트라세(비엔나 중심부 순환도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여름 소나기는 예측 불가능한 아이처럼 갑자기 쏟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개어버린다. 그런 변덕스러움이 오히려 이 도시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6번 트램을 타고 Wien Oper역으로, 다시 슈바르첸베르크 광장에서 D번 트램으로 갈아탔다.


창밖 풍경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구글 맵이 제시한 완벽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때로는 너무 편리해서 아쉬웠다. 길을 잃고 헤매며 발견하는 작은 놀라움들을 놓치는 것 같아서.


그래도 트램 안에서 바라보는 비엔나의 일상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한 차선에서 만나는 트램과 자동차, 때로는 관광 마차까지. 강아지와 조깅하는 사람, 헬멧을 쓰고 가방을 멘 자전거 애호가, 스쿠터를 타고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이들. 캐주얼한 여행객부터 여름날에도 얇은 재킷을 놓지 않는 비엔나 직장인들까지.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삶의 조각들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비엔나 D번 트램을 타고 링슈트라세 북쪽으로 가는 길에.


쉴릭가세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 안내판이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가 50년간 환자들을 만나고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공간. 심리학을 전공한 동생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겠지만, 나는 그보다 이 동네 골목골목에 스며든 일상의 향기에 더 끌렸다. 프로이트 박물관답게 1층 카페에 적힌 "How do you feel today?" 문구는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 나는 어떤 기분일까?'


새로운 동네를 탐험하는 기분이라서 약간 들떠있었다.

메인 거리를 벗어나자 동네의 민낯이 모습을 드러냈다. 5층 높이의 하얀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고,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서로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서점, 장난감 가게, 인테리어 소품점, 오래된 시계 수리점, 도자기 그릇 가게...

각각의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걸었다. 처음 보는 길을 탐험하는 설렘과 익숙해져 가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프로이드 박물관 인근, 골목길 / 작은 가게들과 카페가 있는 거리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풍성한 올리브나무 화분이 놓인 카페였다.

마치 지중해의 작은 마을에서 옮겨온 듯한 그 작은 테라스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올리브나무 옆 자리에는 이미 회색 정장의 할아버지가 천천히 식사를 하고 계셨다.


'30분쯤 더 돌다가 다시 와야 할까?

그때쯤이면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마음은 조급했지만 멀리 가지는 못하는 상황 덕분에, 느릿느릿 반경 50미터를 맴돌며 동네 구석구석을 더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때로는 기다림의 여백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놓아둘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다시 돌아온 그 자리. 아까 봤던 할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 다른 일행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이제는 올리나 나무 옆 자리가 아니어도, 그 카페에서 보낼 시간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서야 이름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Sentepe, Bistro & Cafe


'센터페(Sentepe)'는 터키어로 '너의 산마루'를 의미한다. 카운터 위에는 터키식 아침식사, 샌드위치, 베지테리언(채식) 메뉴, 그리고 다양한 커피와 아이스티 메뉴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Hello!"


높은 톤으로 인사하며 환하게 웃는 직원의 얼굴에서 따뜻한 환대를 느꼈다. 매일 바뀌는 ‘따뜻한 요리’ 코너에는 야채 스튜, 렌틸콩 수프, 사워크라우트(잘게 썬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독일 요리)가 적혀 있었다. 매일 신선한 재료로 그날의 음식을 만든다고 했다.


"One cappuccino, please. “

"Inside or Outside? “

"Outside, please."


오늘 같은 날, 이런 거리 풍경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빨간 어닝의 카페 센터페, 거리 풍경


길가에 놓인 파라솔 아래 2인용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나니 비로소 카페의 전체 모습이 보였다. 흰 건물에 가로로 길게 뻗은 검은 간판, 거기에 사선으로 드리워진 빨간 어닝이 거리에 활력을 더해주었다.


오후 3시 무렵,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 카페 주인이 거리로 나와 스트레칭을 하며 지나가는 할머니와 몇 마디 친근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경쾌한 인사, 자연스러운 대화, 웃는 얼굴. 나중에 알게 된 카페 주인의 이름은 아메트 센터페(Ahmet Sentepe).


터키에서 온 그의 이름을 딴 이 카페는 여러 이유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시나몬 향 가득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하얀 찻잔에 담긴 카푸치노가 나왔다.

나뭇잎 모양의 우유 거품, 가장자리로 갈수록 은은한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시나몬 가루. 우유 거품과 고운 시나몬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향기. 따뜻함과 포근함, 그리고 낯선 거리 한 편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설렘.


다이어리를 꺼내 짧은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때였다.


우두둑.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던 사람들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들고, 어떤 이는 가방에서 우산을 황급히 꺼내 들었다. 파라솔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점점 세차졌다.


한여름의 소나기.

고요했던 풍경이 몇 초 만에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지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빗물이 작은 얼룩을 만들어내며 그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었다.

빨간 어닝과 아이보리 파라솔을 타고 떨어지는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감. 잔잔했던 일상에 기분 좋은 변주가 더해졌다. 평상시라면 무뎌진 채로 지나쳤을 감각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촉촉한 공기의 냄새.

빗방울이 뜨거운 아스팔트에 닿으며 피어오르는 특유의 향.

파라솔 천에 부딪히는 빗소리의 미묘한 변화들.


처음에는 잠시 내리다가 금방 그칠 소나기려니 했는데, 예상보다 비는 쉽게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옆 건물에서 비를 피하던 젊은 엄마가 노란 우의를 배낭에서 꺼내 아이에게 입혀주고 있었다. 노란 장화를 신은 아이는 그저 즐거운 표정이었다.


비가 무슨 걱정거리겠는가. 아이에게 비는 그저 하늘에서 내려주는 또 다른 놀이감일 뿐이다.


한여름의 소나기, 땅바닥에 금세 얼룩을 만든다


날씨 하나로 바라보는 풍경이 이렇게 달라진다.

같은 거리, 같은 사람들, 같은 카페인데 비 몇 방울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버렸다. 빗소리라는 배경음악이 더해지자 평범했던 오후가 갑자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파라솔 아래 앉아 있던 나는 영화 속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과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여유롭게 앉아 이 모든 풍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관객이면서 동시에 이 장면의 일부이기도 한 묘한 위치.


시나몬 향이 섞인 따뜻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빗방울들이 파라솔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카페 센터페(Cafe Sentepe)에서의 이 오후를,

예상치 못한 소나기와 함께 깨어난 감각들을,

그리고 비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까지.


비가 그치자 거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하늘은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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