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함 속의 자유

냄새와 소리가 낯설게 위로된다 / 나슈마르크트 시장과 카페 도안

by 최은희


“내가 사람 많은 시장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원래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늘 내가 선호하는 것은 정돈된 정원, 균형 잡힌 건축, 고요한 미술관이었으니까. 시장처럼 너무 많은 사람이 뒤엉켜 있는 장소는 내향적인 나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비엔나 하면 보통 모차르트의 선율이나 옛 황실의 화려한 건축물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비엔나의 자연스러운 민낯과 숨결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주저 없이 나슈마르크트(Naschmarkt)로 향해야 한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시각과 청각, 후각이 한데 얽혀 감각을 두드리고, 여행자의 마음을 조용히 뒤흔드는 곳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그곳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놓이게 했다. 소란은 분명했지만 불쾌하지 않았고, 낯섦은 가득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평범한 바질이나 로즈마리가 아닌, 이름은 아득하고 향은 선명한 것들. 커민, 타임, 수마트라 후추,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던 약간은 쿰쿰하고, 묘하게 감각을 붙잡는 공기.


‘원래라면 이 냄새를 피해 빨리 지나갔을 텐데.’


고수나 산초와 같은 향신료에도 거부감이 드는데, 그날은 천천히 걸었다. 오히려 서로 뒤섞인 향이 작은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의 감각은 조용히, 그곳에 자주 다녔던 사람처럼 익숙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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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슈마르크트 시장, 아티초크 (야채) 가게 / 라쿰 (젤리) 가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수십 개의 좌판이 이어졌다.

과일, 채소, 견과류, 치즈, 생선, 향신료, 초콜릿,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조림들까지. 길가에 무질서하게 쌓인 무화과 바구니는 햇살을 받아 조금씩 익어갔고, 그 옆에서는 가게 주인이 두툼한 햄을 얇게 썰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이 오가고, 손짓과 표정이 가격 흥정을 대신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그 무심함 속에서 오히려 편안해졌다. 그저 눈길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있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이국적인 식재료를 체험하려는 관광객, 단골 가게에서 언제나 같은 빵을 사는 현지인, 그리고 그 둘을 향해 웃음을 건네는 상인들 사이에서 묘한 교감이 오갔다.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곳에서 '음식과 만남'이라는 보편적 경험이 서로 다른 모든 배경을 덜어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었다.


햄과 살라미를 파는 소시지 가게 벽면에 붙은 재미있는 포스터가 시선을 끌었다. 가게 이름은 '우어 부어 슈트(Uhrwurscht)', 구글 렌즈로 검색해 보니 '시계 소시지'라는 뜻. 실제로 두 개의 소시지가 11시를 가리키며 시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포스터 속 장면은 만화 같았다. 붉은 지붕 위에서 럼주를 마시던 두 남자가 긴 막대기로 가판대의 소시지를 낚으려 하고, 초록 제복을 입은 경찰은 아래에서 손짓하고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닥스훈트가 입에 비엔나소시지를 문 채 도망치고 있었다.


"낚시 허가증이 있나요?(Habt's ihr überhaupt a Fischer-karte?)"라는 독일어 문장이 함께.

그 유쾌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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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소시지 가게, Uhrwurscht / 올리브 가게 (나슈마르크트 시장)


알프스산 소나무 오일로 만든 수제 비누를 파는 상점 'Alles Seife', 시리아식 바클라바와 이탈리아 수입 그릇을 함께 볼 수 있는 'Mr. Hawramy'. 여러 치즈를 시식할 수 있는 베테랑 치즈 상점 'Käseland', 중동 요리 소스인 휴무스를 파는 가게까지.


‘이런 생소한 물건들을 파는 가게는 잘 기억해 둬야지.’


좋고 나쁨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이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던 신기한 물건을 보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은 사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어진다. 이럴 땐 현지인인 척해봐도, 나도 어쩔 수 없는 관광객이라는 게 느껴진다. 모든 걸 직접 맛볼 순 없어도, 눈으로는 마음껏 담는다. 그리고 별 것 아닌 각양각색의 채소와 과일을 보고 있으면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색연필을 들고 생생한 컬러와 특이한 생김새를 따라 그릴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꽃처럼 생긴 아티초크는 얼마나 좋은 드로잉 소재인가. 색다른 시각적 경험과 후각적 자극이 복합적인 공간 기억으로 새롭게 새겨졌다.




오후 2시. 한참을 걷다 잠시 멈춘 곳은 Cafe Do-An.

시장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카페였다. 점심시간을 조금 비켜가서였을까, 그곳은 한낮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난 여유로움을 품고 있었다. 외부의 소란을 고스란히 배경 삼으면서도, 시장 한가운데의 쉼표 같은 곳.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마치 잔잔한 음악처럼 스며들었다.


마침 비어있던 창가 자리에 앉아 채식 전채요리를 주문했다. 부드러운 바게트 빵과 함께 커다란 파란 접시에 담겨 나온 요리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튀긴 가지 ‘멜란 차니’, 병아리콩을 으깨 만든 ‘휴무스’, 올리브오일을 섞은 그리스식 요구르트 소스, 중동식 튀김 ‘팔라펠’, 그리고 호두와 시금치를 넣어 만든 밀 샐러드. 그 사이사이로 들어간 향신료의 미묘한 균형이 미각을 자극했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살구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이곳이 익숙한 사람에겐 특별할 것 없는 한 끼일 테지만,

처음인 나에겐 참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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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카페 도-안, 채식 전채요리


옆 자리에는 나이 든 부부가 와인을 마시며 종이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디지털 기기로 뉴스를 읽는 요즘 시대에 그 조용한 움직임이, 오늘 이 한낮의 풍경을 더 정겹게 했다. 카페의 피크 타임이었다면 눈치 빠른 한국인인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 앉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비엔나 시장 한복판에서 나를 둘러싼 이 여유로움 덕분에 나는 '그저 머물고 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비엔나에서의 내 경험은 항상 이렇지만은 않았다. 중산층이 사는 안전지역에 머물고 있지만, 집 근처 카페는 손님도 많지 않고 카페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불편해서 들어가기조차 어려웠다. 관광지를 벗어난 동네 카페는 주로 남성들의 공간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나슈마르크트 시장의 시끌벅적함, 익숙하지 않은 냄새와 알 수 없는 언어 속에서도 조용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무도 동양인 여자인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편안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서일까, 이곳에서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고,

나도 누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 무심한 시선들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리감 속에서, 나는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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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슈마르크트 시장, 허브차 상점 / 납작 복숭아와 프라우메(독일 자두)


비엔나의 가장 애정하는 장소 중 하나가 이곳이다. 특정한 건축물도, 유명한 미술관도 아닌, 사람과 물건과 소리와 냄새가 뒤섞인 그 장소.


머무는 동안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비슷한 것들이 놓여 있었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냄새가 풍겼지만 이상하게도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아마도 시장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다른 날씨, 다른 사람, 다른 감정이 스며들고, 그에 따라 호흡이 조금씩 달라지는 장소.


삶이란 본래 어질러지고, 냄새나고, 시끄럽지만,

동시에 다채로운 감각을 지닌 것임을.

그리고 때론 혼잡함 속에서도, 아니 혼잡함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한국에서라면 피했을 이 모든 것들이,

비엔나에서는 낯설게 위로가 되었다.

냄새와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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