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의 무게를 내려놓다

카페 워트너 1880, Cafe Wortner

by 최은희


비엔나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보는 일이 좋았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급함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와인 한 잔으로 두 시간을 견디고, 신문을 한 글자씩 읽고, 친구와의 말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시간을 움켜쥐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기는 연습.


공간이 건네는 위로는 말보다 더딘 걸음으로 천천히 온다. 하지만 깊숙이 스며든다.


시내 곳곳의 벤치에 몸을 맡길 때마다 내 안에 쌓인 피로가 하나씩 풀려나갔다. 발끝이 가리키는 대로 거리를 거닐며, 테라스 창가에 놓인 분홍빛 제라늄을 바라보며, 내 삶의 박자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깨는 여전히 무거웠다.

며칠간 발품을 판 피로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달콤함 사이사이로 복잡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젊은 시절과는 달라진 나, 곧 마주할 현실적인 숙제들, 혼자만 달콤한 여행을 즐긴다는 미안함, 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까지. 빡빡한 여행 가방처럼 생각보다 묵직한 것들이 마음에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그런 심란한 오후였다. 우연히 카페 워트너를 발견한 건.




카를 대성당 뒤로 쭉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넓은 자전거 도로를 따라 노란 아킬레아가 핀 작은 화단이 이어졌다. 서양톱풀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들이 평온한 산책길을 만들고 있었다. 안톤 벤야 공원에서는 키 큰 플라타너스와 물푸레나무들이 바람에 격렬히 흔들렸다.


노란 아킬레아(서양톱풀) / 안톤 벤야 공원


'아, 그래서 길바닥에 마른 가지들이 떨어져 있었구나.'


도심 곳곳에 별처럼 박힌 작은 공원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꽃처럼 피어났다. 발걸음을 따라가다 벨기에 대사관을 지나게 되었다. 비슷비슷한 건물들 사이, 어느 창문에서 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굵직하고 깊은 선율이 오후 공기를 타고 퍼졌다.


'여기는 선율이 숨 쉬는 도시였지.'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 없는 도시 유랑은 여기서 끝. 6번 트램을 타러 마이어호프가세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햇빛 색 건물이 시선을 붙잡았다.


1층에 자리한 카페 워트너였다.



카페 워트너 1880 / 6번 트램, 마이어호프가세 역 근처


칼스플라츠의 대로에서 몇 블록 벗어난 고요한 골목길.

화려한 간판도, 현혹하는 인테리어도 없었다. 3층 높이의 노란색 벽에 붉은색 지붕을 얹은 건물. 주변엔 가로수들이 보호막처럼 에워싸고 있었고, 1층엔 검은색 어닝을 길게 늘어뜨려 외부 테이블들을 품고 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했다. 하지만 카페 앞 삼각형 터의 작은 공원을 앞마당처럼 바라보고 있는 건물 배치가 좋았다. 야외 테이블의 사람들과 거리의 보행자 모두에게 열린 넉넉한 모습이 마음을 끌었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후회할 것 같은데.'


천막에 새겨진 하얀 고딕 글씨. CAFE WORTNER 1880.


'거의 150년의 숨결이 깃든 카페.'


묵직한 오크 문의 W 모양 손잡이를 밀어내며 발을 들였다. 고전적인 디자인 요소와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를 절충한 실내가 팔을 벌려 맞았다. 천장을 향한 벽은 하얀 물감과 소박한 몰딩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벽면은 중간 톤의 브라운 원목이 공간에 무게감을 더했다.


원목 테이블과 짝을 이룬 푹신한 아이보리 벨벳 소파.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샹들리에, 벽의 흑백사진들, 구석구석의 테이블 램프, 귓가를 간질이는 경쾌한 올드 팝까지. 앤티크함과 경쾌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비엔나에서 여러 카페의 문턱을 넘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여러 번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피어올랐다. 15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킨 공간이 말없이 나를 품었다.


카페 워트너 1880 / 화이트, 브라운, 블랙이 어우러진 우아한 분위기


"Hello."


갈색 긴 머리를 뒤로 묶고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여직원이 안쪽 벤치 소파로 안내했다. 종업원들의 드레스코드는 블랙. 외부 차양도, 냅킨도, 설탕 포장지까지 블랙. 냅킨에는 '1880 W'라는 글자가 세로로 긴 타원형 안에 밝은 그레이로 새겨져 있었다.


'세세한 것까지 일관되게 정체성을 유지했군.'


테이블 위 영어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에스프레소, 멜랑슈, 카페 라테, 마키아토, 카푸치노, 아이리시 커피. 다양한 커피가 있었지만, 왠지 이곳에서는 여름 계절의 맛, 살구 주스가 끌렸다.


"Apricot juice, please."

"What is apricot juice in German?"

"Marillensaft."


카페 워트너 1880, 살구 주스와 밀페유 / 민트차와 연어 샐러드


시간이 발걸음을 멈춘 오후.


옆 테이블에서는 할머니가 20대 손자, 손녀와 함께 식사를 하며 작은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낮게 웃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독일어가 잔잔한 음악처럼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공간은 관광객들보다 현지인들의 일상이 뿌리내린 동네 카페였다.


창유리를 타고 스며드는 오후 햇살. 홀로 식사하며 신문을 읽는 할머니. 커피 향기와 함께 업무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 젊은 연인. 모두가 시간에게 쫓기지 않았다. 그들의 여유로운 리듬에 나도 덩달아 마음 한편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살구주스 한 잔과 밀푀유 케이크 한 조각이 작은 선물처럼 차려졌다. 밀푀유는 종이처럼 얇은 페이스트리 사이에 잼이 달콤한 비밀을 숨기고 있어 혀끝에 행복을 선사했다. 살구주스는 단순하면서 건강한 맛이었다. 한국이었으면 그냥 마셨을 주스, 여기서는 재료의 맛 하나하나 음미하게 되었다.


카페 안은 조용했지만 적막하지 않았다. 커피 머신이 토해내는 증기 소리, 신문이 바스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 찻잔과 접시가 만나는 은은한 화음, 카페 입구의 발걸음 소리. 일상이 빚어내는 소음들이 자연스러운 선율로 어우러졌다.


'앞으로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

여기서의 시간을 즐겨.'


카페 워트너 1880 / 현지인들의 일상이 스며든 카페




어깨에 얹힌 무게가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번개처럼 찾아오는 깨달음이나 드라마틱한 변신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고요한 공간에서 한 모금의 음료를 마시는 동안, 단단하게 웅크렸던 마음이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걱정이 많아졌을까?'


여행 가방에 꽁꽁 담아 온 무거운 마음들을 하나씩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찬찬히 바라보니 생각보다 작았다. 여기,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쌓인 공간 앞에서는 내 근심들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살구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단순하고 정직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마음 한구석이 환해졌다. 창밖 작은 분수대에서는 물이 솟구쳐 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그 고요한 반복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1880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카페 워트너.

붉은 목재를 비추는 은은한 조명, 흑백의 장식품이 주는 안정감, 귓가를 스치는 올드팝의 경쾌함. 어디에나 있을 법한 요소들이 이곳에서는 하나의 온기로 뭉쳐졌다. 사람들의 다정한 움직임도, 시간에게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리듬도, 모두 잔잔한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위로는 소리 없이 찾아왔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닿았다.


한국에서라면 조급하게 서둘렀을 오후를, 비엔나에서는 이렇게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살구주스 한 잔과 밀푀유 한 조각, 그리고 거의 150년 동안 사람들의 흔적이 쌓인 그 공간에서, 별것 아닌 것들이 어깨에 얹혔던 무게를 조용히 덜어주었다.


트램을 타러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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