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박물관에서 / Wien Museum
나는 미술관을 무척 좋아한다. 반면 박물관은 지루했다.
그림 앞에서는 자꾸만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유리 케이스 속 유물 앞에서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2천 년 전 철제 투구도, 중세 기사의 갑옷도, 모두 유리 너머에 갇혀 있다.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비엔나에서 이상한 박물관을 만났다.
칼스플라츠 공원을 가로지르다 발걸음이 멈췄다. 오래된 석조 건물 위로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가 얹혀 있었다. 상층부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엔나 박물관, Wien Museum.
'저게 박물관이라고?'
매달 첫 번째 일요일은 무료 관람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
유리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수직으로 높게 비워놓은 로비가 나타났다. 심플한 직육면체 벤치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데, 안에 들어서니 창밖의 카를 성당 초록빛 돔이 보였다. 박물관 같지 않은 박물관이었다.
층별 안내판을 봤다. 지상 0층은 석기시대부터 중세, 1층은 근세, 2층은 근대부터 현대, 3층은 테라스와 이벤트 공간. 도시의 역사를 수직으로 따라가는 구조였다.
'시간의 계단이네.'
그렇게 나는 비엔나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석기시대를 지나 전시물을 보다 보니 중세였다.
천장이 어두운 색에서 밝은 색으로, 빛의 색도 은은하게 변했다. 비엔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성 슈테판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여서 시대가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중세 기사들이 손과 손목을 보호했던 철제 장갑, 건틀릿이 놓여 있었다.
"Try it on." 착용해 보세요
"How well can you move in armor?" 갑옷을 입고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나요?
독일어 옆에 붙은 그림이 친절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집어넣었다.
무거웠다.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쇠가 손목을 감싸는 순간, 그 무게가 팔 전체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움직이려니 뻣뻣했다. 주먹을 쥐려고 했는데 잘 쥐어지지도 않았다.
건틀릿 옆에 걸린 사슬갑옷 조각을 들어 올려봤다. 양손으로 들어도 무거웠다. 팔이 후들거렸다.
'장갑 하나가 이렇게 무거운데,
사슬갑옷 이걸 온몸에 걸친다고?
그 상태로 말을 타고 달린다고?
검을 휘두른다고?
정말 미쳤네!’
800년 전 중세의 찰나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서 왕' 책에서 본 용맹하고 정의로운 기사들. 영화에서 본 십자군 전쟁의 치열한 전투. 모두 멋있어 보였다. 갑옷이 빛나고,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깃발이 펄럭이던 그 장면들.
그런데 지금 내 손목을 누르고 있는 이 무게는 근사한 낭만이 아니었다. 이건 생존이었다.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죽는 거였다. 딱딱한 금속 갑옷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게, 그 사람도 나처럼 이 무게에 팔이 떨렸을 거라는 게, 갑자기 실감 났다.
몇 걸음 옆으로 가다가 멈춰 섰다.
벽면 가득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 중세 시대 그림. 천국과 지옥. 왼쪽엔 천사들이 하늘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빛 속으로 올라갔다. 오른쪽엔 불길이 치솟고, 괴물 같은 것들이 사람을 끌고 가고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
그 그림 옆으로, 저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양팔 저울. 그리고 나무판들. 무게 추처럼 생긴 나무판마다 질문이 쓰여 있었다. 자신의 대답에 따라 저울 왼쪽은 천국, 오른쪽은 지옥, 둘 중 한쪽에 나무판을 올려놓는 게임.
'뭐야, 이거.'
처음엔 그냥 재미있는 체험인 줄 알았다. 첫 번째 질문 판을 집었다.
"솔직하게 행동했나요?"
음... 솔직하게? 항상 그렇진 않지. 저울 오른쪽에 올렸다.
두 번째. "다른 사람을 도왔나요?"
이건 왼쪽이지. 저울이 살짝 왼쪽으로 기울었다.
세 번째. "욕심을 부렸나요?"
아, 이건... 오른쪽. 저울이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네 번째. "무관심했나요?"
손이 멈췄다.
무관심. 나, 무관심했지. 많이. 불편한 뉴스를 피하고, 힘든 이야기를 외면하고, 관심 가져야 할 때 고개를 돌렸다. 나무판을 오른쪽에 올렸더니 저울이 더 기울었다.
다섯 번째. "거짓말을 했나요?"
했지. 크고 작은 거짓말들. 오른쪽 저울로.
여섯 번째. "용서했나요?"
용서... 했나? 정말 용서했나? 그냥 덮어둔 거 아냐? 한참을 망설이다 오른쪽에 올렸다. 저울이 완전히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질문들이 더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저울을 한참 바라봤다. 내 삶의 크고 작은 선택들. 오른쪽, 빨간 불길 쪽으로 기운 저울.
'나, 좀 별로네...'
헛웃음이 나왔다. 천국으로 가는 올바른 삶, 참 어렵구나 싶었다.
고개를 들어 그림을 다시 봤다. 천국과 지옥. 800년 전 사람들이 느꼈을 그 마음이 조금 이해됐다. 두려움. 하지만 동시에, 명료한 깨달음도 주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
저울 밑에 나무판들이 더 있었다.
아직 답을 하지 않은 질문들.
그건 아직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 동안, 다시 시작할 기회.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마지막 코너, '칼스플라츠, 당신의 공원'이 있었다.
나무 퍼즐 조각들이 놓여 있었는데, 벤치, 나무, 분수, 놀이터, 마켓. 자신이 원하는 공원을 만들어보라는 거였다. 나무판 하나를 집었다. 놀이터. 어디에 놓을까. 그늘진 곳? 아니면 햇볕 드는 곳?
나무 조각을 또 집었다. 나무 몇 그루나 필요할까. 빽빽하게? 아니면 여유 있게?
놀이터를 이쪽에 놓았다가, 저쪽으로 옮겼다. 나무를 더 놓았다가, 하나를 빼냈다.
어떤 공원을 만들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거구나.'
아까 저울이 물었던 것.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 퍼즐이 묻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였다.
벤치 하나 놓는 것처럼, 작은 선택 하나가 쌓여서 결국 내 삶이 되는 거였다.
저울은 과거를 보여줬다. 이미 기울어진 무게.
하지만 퍼즐은 미래를 묻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디에 놓을 거냐고.
또 다른 질문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 공원은 쉬기 좋은 곳인가요?"
"눈을 감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 보세요."
박물관이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과 앞으로를.
3층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카를 성당과 칼스플라츠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 방금 전 내가 퍼즐로 만들던 그 공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모든 게 작아 보였다. 저 아래 사람들도, 건물들도, 공원도.
나는 오늘 800년 전 사람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만졌다. 차가운 쇠가 손목을 누르는 무게도 만졌다. 그리고 내 선택들이 저울 위에서 기우는 순간도 만졌다. 그렇게 과거를 만지는 순간 현재가 됐다. 그리고 현재는 질문을 던졌다.
바람이 또 불어왔다.
이제, 어떻게 살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