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도 평온할 수 있을까?

폴 델보, 랜턴이 있는 풍경 / 알베르티나 미술관

by 최은희

밤거리였다.

가로등 아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고, 저 멀리 두 남자가 수의에 덮인 시신을 들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전신주의 전선은 끊어져 있었다.


폴 델보의 '랜턴이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Lanterns, 1958)' 앞에서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죽음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토요일 오후 1시. 게으른 여행자 모드로 집을 나섰다.

비엔나 7월, 아침 15도 낮 27도. 한국이었다면 38도 무더위에 갇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릴 적 땅재먹기 놀이처럼 한 뼘씩 지도를 넓혀가고 있었다.


알베르티나 광장에 도착했을 때,

소시지 가게 지붕 위에 초록 토끼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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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토끼 조형물이 있는 소시지 가게 / 뒤러의 젊은 토끼(1502), 알베르티나 미술관 1층 전시실


'...... 뭐지, 저거?'


에메랄드빛 거대한 토끼 조형물. 귀를 세우고 앞발을 모은 자세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물들 사이에서 저 색깔은 터무니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쾌했다.


알고 보니 알브레히트 뒤러의 젊은 토끼(1502)였다. 500년 전 화가가 붓으로 한 올 한 올 그린 작은 토끼. 금방이라도 코를 찡긋할 것 같던 그 토끼가 지금 소시지 가게 지붕 위에서 거인이 되어 있었다. 크기도, 색깔도, 재질도 전부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예술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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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나 미술관, 건축가 한스 홀라인의 티타늄 윙


한스 홀라인의 은빛 윙이 건물 위로 뻗어 있었다.

60미터 날개. 궁전이 막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보관함에 가방을 넣고 1유로를 넣자 검정 열쇠가 나왔다. 주머니엔 핸드폰, 신용카드, 열쇠만. 어깨가 가벼워지니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3층 높이의 로비에 들어서자 유리 천장 너머로 비엔나의 파란 하늘이 쏟아졌다. 전시 포스터에 '모네부터 피카소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봐야 할 건? 모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으로. "인상주의 – 빛을 그리다."


모네의 수련은 예상보다 작았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하지만 초여름 연못의 숨결은 충분히 느껴졌다. 연한 초록, 노랑, 퍼플, 스카이블루. 수면 위와 수면 아래가 하나의 화폭에서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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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나 미술관 <모네부터 피카소까지> / 모네, 수련 The Water Lily Pond(1917~1919)


인상주의를 지나 야수파를 거쳐, 초현실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폴 델보를 처음 만났다.



KakaoTalk_Image_2025-07-12-22-52-21_019.jpeg 폴 델보, 랜턴이 있는 풍경 (1958) / 알베르티나 미술관 2층 '초현실주의' 전시실


랜턴이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Lanterns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꿈보다 더 고요한 무언가였다.


사실적인 장면 같지만, 신비로운 몽상의 세계.

작품 설명에는 과거를 향한 우울하고 회상적인 시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화면 중앙, 검은 드레스의 여자가 등을 보인 채 서 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엔 장례 행렬. 가로등 아래 두 남자가 수의에 덮인 시신을 들고 언덕을 오른다. 언덕 너머엔 고대 폐허들. 전신주의 전선은 끊어져 있다.


숨소리마저 조용히 내쉬어야 할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누군가를 보내고 남겨진 여자가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등을 보인 채 저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을 뿐.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곳을.


델보의 밤거리엔 사람들이 흩어져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멈춘 영화 같은 장면들.

그런데 이상했다. 그들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벨베데레 왕궁에서 봤던 에곤 실레의 인물들은 달랐다. 왜곡되고 불안했다.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며 고독을 드러냈다. "내 고독을 봐라"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델보의 인물들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받아들임으로.


델보가 그린 건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죽음의 담담함이었다.

질문도 없이, 거부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침묵.


'그는 정말 이런 담담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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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너머의 세계,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재작년 봄과 여름, 시부모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오십을 넘기니 죽음이 더 이상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모님 세대가 하나둘 떠나가는 걸 보게 됐다.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 속 환한 미소를 보며 '이게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살아생전 더 자주 찾아뵐걸. 더 많이 안아드릴걸. 그런 후회들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깨달았다. 죽음은 늘 예고 없이 온다는 걸.


어제까지 전화 통화하던 사람이 오늘 없다.

내일 만나자던 약속이 영원히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말해둔다.


"함께여서 좋았어. 함께여서 행복했어."


아이들도 어색해하고, 남편도 "갑자기 왜 그래" 한다. 하지만 일부러 자주 말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 어색함이 나중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델보의 그림 앞에 서니 그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통과하는 문이라는 것.

무서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저 검은 드레스의 여인처럼 한동안 등을 돌린 채 그곳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돌아서서 좋았던 기억을 간직하며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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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나 미술관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거리 풍경


미술관을 나왔을 땐 오후 6시였다.

광장의 초록 토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광장은 여전히 밝았다. 토요일 저녁으로 변해가는 거리, 사람들이 오가고 카페가 북적댔다. 젊은이들이 웃었다.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델보의 밤이 이 밝은 거리에도 겹쳐 보였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경계가 얼마나 흐릿한지.

아니, 경계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게 아닐까.

우리는 매 순간 살면서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실레는 고독을 숨기지 않았다.

델보는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삶이 더욱 선명해진다.


비엔나 거리를 걸으며 폴 클레의 말이 떠올랐다.


"예술은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델보는 죽음을 그린 게 아니라,

죽음을 마주하는 자세를 보이게 했다.


한스 홀라인의 은빛 윙이 저무는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아래 초록 토끼가 500년 전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델보의 밤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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