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숲과 나무가 많았다. 건강한 허파를 제공하는 산림이 발발한 전쟁 중에는 눈엣가시로 떠오른다.
허파를 활용한 베트남의 게릴라전에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선을 넘는다.
이른바 풀과 나무가 말살하는 사약인 고엽제를 위에서 살포한 것이다. 자연에게 치명적인 것은 공존. 공생. 상생하는 우리 인간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흡입한 식물이나 사람은 갖가지 후유증에 노출된다. 각종 암은 물론 당뇨병과 신경과 근육, 호르몬을 교란하여 인체를 망가뜨린다. 게다가 2세에까지 마수를 뻗쳐 기형을 낳게 한다.
전쟁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세계유일한 분단국가이다. 국력이 쇠퇴한 조선말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략은 결국 집안이 둘로 쪼개지는 상흔을 남겼다.
전쟁이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승자와 패자의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과욕을 드러낸 두 나라인 독일과 일본은 전쟁 후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과거를 오독하는 일본도와 반성하고 사죄하며 역사를 인정하는 도이칠란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다.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다. 우리가 눈부신 성장의 한복판에서 잊고 있던
역사를 머나먼 이역에서 오랜 조사를 거친 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열린 윤대통령 국빈 만찬에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이민진 작가의 자이니치가 그러하다. 작가를 살펴보니 남편이 일본계 미국인이라 한다.
이민진 소설 [파친코]를 속독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도서관에 갔다. 사서가 뜬금없이 말한다.
"작가님은 신간 코너는 관심이 없으시나요?"
"네? 설마요."
"오시면 늘 신간 코너는 안 가시더군요."
"신간 코너는 어디인가요?"
세상에나 사서님이 계신 곳의 정면이었다.
늘 다른 곳만 둘러보았다.
눈 뜬 장님처럼 가까운 곳은 멀리한 나는 안다는 지보다
높은 명을 몰랐다.
신간 코너는 익히 들어본 눈을 맑게 하는 책들이 등 돌리고 있었다. 언제 나를 꺼내줄 거야. 내 앞모습이 궁금하지 않느냐는 보물 찾기와 같다.
파친코는 책 보다 애플 티브이가 방송한 영상으로 먼저 만났다. 특히 4화는 영상미가 뛰어나서 여운이 컸다. 쌀을 씻어 밥을 짓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상은 대사가 없어도 딸을 결혼과 동시에 타국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잘 담아냈다. 우리 쌀밥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로 '쌀을 씻으며'란 영감을 받아낸 딴에는 긴 시를 창작했다.
유튜브에서 저자가 질문에 응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영어로 오간 대화의 수준이 꽤 높았다. 작가의 따스한 표정과 열정이 인상 깊었다.
파친코는 사행심을 불러일으키는 복권과도 같다. 왜 제목이 파친코일까.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생일 때마다 지문을 찍으며 차별을 받아야 하는 자이니치의 생이다. 뿌리를 숨겨 일본인으로 살 것인가. 뿌리를 숨기지 않고 자이니치로 살아갈 것인가. 파친코는 야쿠자로 인식하는 그늘을 따라간다.
이야기의 수도꼭지엔 선자와 고한수 그리고 백이삭이 있다. 선자를 구심점으로 고한수의 동적인 욕심을 채우는 사랑과 백이삭의 베푸는 정적인 사랑이 대조된다.
경희를 둘러싼 두 남자인 남편 요셉과 창호의 사랑도 생각의 여지가 많았다.
사랑의 무늬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삭이 선자에게 그리고 영혼의 아들인 노아에게 건네는 말은 천사의 언어가 있다면 이런 가 싶을 만큼 따뜻하다.
와세다 대학에서의 노아가 위태위태하다. 플롯 상으로 볼 때 이때쯤이면 갈등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전되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는
요셉은 어떻게 될까도 걱정스럽다. 한수에 대한 선자의 양가감정은 첫정이라서 무의식에 녹아 있었나, 아니면 노아의 생부이기 때문인 걸까. 꿈은 무의식의 발로라고 하지 않던가.
이상주의자인 백이삭 목사는 너무나 깨끗한 백지 같아 위태해 보인다. 그럼에도 선자를 영안으로 심안으로 바라보는 눈은 아름답다. 영혼이 맑은 사람은 천국의 천사들이 일찍 데려가는 것 같다. 천국에서 오래 살라고 말이다.
선자와 경희의 자매보다 돈독한 연대는 척박한 일본에서
남편의 우산 밑이 아닌, 스스로 우산이 되려 한다. 지혜롭고 삶에 비관이 아닌 정면 돌파가 참으로 아름답다.
고한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김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식당에 납품할 수 있어서 가정경제가 살아났는데, 알고 보니 야쿠자 장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고한수가 뒤에서 물밑작업으로 선자를 도와준 것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랑이란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선자는 속이 찬 더께라면 고한수는 속은 조금 덜 찼지만 겉으로는 화려하고 날카로운 꼭지를 갖고 있다.
고한수의 날카로움으로 살아남았고 선자를 향한 정상적인 무늬는 아닐지라도 진심이었는가. 선자가 늘 그리워한 엄마인 양진을 영도에서 일본으로 데려온다.
누추하지만 모녀 상봉으로 둘은 함께 할 수 있었다.
노아가 좀 불안하다. 끌리면 다칠 것을 오감은 알았다. 그런데도 촉수는 그를 향해 뻗어 나간다. 세상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연도 있는 법이다. 그 연으로 인해 불행의 판도라를 열게 된다. 비밀은 언젠가 벗겨지기도 한다. 고한수를 만나는 일식집에 호기심이 뒤따라와서 굳이 몰라도 될
불구덩이를 던져주는 연, 그래서 연은 또 다른 업일지도 모르겠다.
고한수는 오랫동안 선자의 주위를 맴돈다. 그들의 아들인 노아가 고한수의 핏줄임을 거부한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여전히. 선자의 무의식은 뭘까. 꿈에 한수가 나타나는 해석은 무엇일지 모르겠다. 이삭은 고마운 사람이라 플라토닉이고 한수는 첫 정의 함정인 에로스인 걸까.
힘없는 민족은 서럽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그렇다. 그. 러. 나. 나라 잃은 설움엔 비할 바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백조처럼 힘을 키워야 한다.
세계 유일 분단국가임에도 왜 우리는 자꾸만 갈라 치기를 하는 것일까.
똘똘 뭉치면 안 되는 것일까. 여전히 곳곳에 모래처럼 긁는 유해한 환경이 있다.
하나가 안타깝다. 뇌를 리모델링하는 거라는 십 대에 엄마의 바람과 이혼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를, 결코 아름답지 못한 구렁으로 가라앉힌다.
엄마와 딸은 과학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관계이다.
십 대는 맞는 말을 하는 엄마의 바른말조차도 비딱하게 들리는 시기가 아니던가.
신묘하게도 엄마란 자리는 딸에게 닮고 싶지 않지만 닮아가는 이중성이 숨어있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해 줄 수 없다.
나비 포옹으로 잘했고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리라.
자기애가 쩐다고 남이 흉보면 좀 어떤가.
내가 나를 사랑해 주겠다는데.
백노아는 영혼까지 백이삭의 아들이었다. 고한수가 물질로 아버지의 자리를 사려해도 백이삭의 아들은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다. 요셉이 염려했던 부분은 아귀처럼 딱딱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