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사방에 예리한 촉수가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는 기민하다
질투는 사방에 예리한 촉수가 있다
누보로망이란 것이 무얼까 궁금했다.
사전은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한다.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는 소설이라 말한다.
줄거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독자는 적극적으로 독서를 해야만 한다. 왜 적극적인 독서를 해야 하는지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깨닫는다. 과연 인내심이 필요한 소설이다. 144페이지 약간 작은 크기의 책이 이렇게나 완독이 힘들 줄이야.
기필코 완독 해서 후기를 써 보리라 마음먹고 읽기에 몰입하려 했다. 정말 힘들다. 한마디로 괴롭고 지루하고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2월 16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2월 28일 저녁에야 비로소 끝을 볼 수가 있다.
읽으면서 불편하고 덮고 싶으면, 중간중간 시집을 읽거나 다른 책으로 외도하며 딴짓했다. 일례로 한 페이지를 사흘 동안 넘기지 못한 적도 있다. 그만큼 힘들었다.
화자인 주인공의 정보는 매우 인색하게 절제했다. 나머지는 치밀하고 적나라하게 각도와 자를 동원하여 잰 정확한 치수를 묘사한다. 화자가 궁금했지만, 카메라아이를 통해서만 슬쩍 수면에서 드러내고 다시 잠수를 반복한다.
A라고 지칭한 화자의 아내와 이웃집 남자인 Frank가 주된 관찰 대상이다. 얼마나 전략적으로 철두철미하게 관찰하고 접근하는지 소름이 끼친다. 이 남자가 내 남자라면 벌써 줄행랑을 쳤으리라. 얼마나 숨 막히도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지 나도 모르게 소리친다. “차라리, 네 부인에게 대놓고 물어봐라. 바람피우는 거 맞냐고!”
참, 사람 피 말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렇지 않은가. 의심의 눈초리로 부인이 앉은 위치, 머리 빗는 손 모양과 빛의 굴절까지 모조리 꿰는 남자. 과연 부인이 모를 리가 있을까. 분명 부인은 이 남자의 의심에 눈초리를 여자의 레이다인 육감(식스 센스)으로 감지하고 있다.
화자는 질투에 절어 잔혹하도록 주변을 인식한다. 벌레의 움직임과 날갯짓하는 미세한 소리까지 깔때기인 듯 수렴한다. 포석에 한 마리가 떨어졌는지 몇 마리인지까지도 알아채는 청력이라니. 질투가 뻣어나간 귀청의 초능력은 한계가 없다.
인간 내비게이터이자 인간 각도기이자 현미경의 콜라보이다. 민감하고 기민한 촉수를 뻗는 남자다.
이런 남자를 부인이 모를 수가 없다. Frank의 새 세단에 문제가 생긴다.
하룻밤을 꼬박 세고 귀가한 부인에게 질문하는 장면은 작가가 배제했다. 분명 부인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 놓고 묻는다면 말해줄 사람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하고 싶다. 오히려, 남자의 철저한 관찰을 즐기는 것 같은 의구심마저 들기 시작한다.
작가는 국립통계연구소에서 근무한 전적이 있다. 그래서 이토록 기하학적인 표현을 남발한다. 소위 몸에 밴 직업은 못 속이는가.
바나나 농장주로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의 집 주변 및 부인이 있는 자리를 드라마틱하도록 정밀하게 기하학적으로 묘사한다.
무릇 소설이라 하면 플롯이 있어야 한다. 이 소설은 그것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적 배경, 사건, 성격, 줄거리랄 것이 없다.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화자는 마치 걸어 다니는 카메라 같다. 이 소설이 허구라는 것에 전혀 언급이 없다. 소설은 픽션, 허구가 생명이라고 선입견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독자를 들여다본다.
참으로 불편한 원인은 기존의 소설을 타파하고 화자의 질투에 휩싸인 편집증 환자 같은 잔혹한 감정이 만든 묘사 때문이다. 오랫동안 탯줄로부터 이어받은 관습이나 기법은 하루아침에 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읽는 내내 즐길 수가 없다.
누보로망의 선두주자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는 오랫동안 각인될 듯싶다.
특이한 경험임은 가히 부정할 수 없다. 실험적인 소설, 술술 읽기엔 무리가 있다.
뇌와 엉덩이와 눈에 힘겨운 희생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문학을 깨뜨린 이 소설 통하여 저자가 얼마나 고심하고 역량을 꺼내려 애썼을지 생각해 본다.
1957년 미뉘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겨우 746부의 판매고를 올렸다. 지금도 실험적이고 획기적인 소설임을 분명하다. 당시에도 극명하게 대립한 프랑스 문단이다. 그 와중에도 옹호자는 있었다. 샤르트르, 카뮈, 바르트, 블랑쇼, 바타이유 등 21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의 실험정신을 높이 산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것은, 늘 후세에도 논란과 명성을 가져온다. 영국 작가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전이라 칭할 수 있는 세계문학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