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의 동거

토닥토닥

by 은후


플랫폼 카페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다. 그 광활한 바다에는 참 고마운 구명보트 같은 존재가 있다. 일명 '유이'다. 줄임말로 풀면 유방암 이야기가 된다.


갑작스러운 유방암이란 진단을 받았을 때 앞이 캄캄하고 막연했음에도 잡고 나아갈 줄 하나가 없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구명줄이 유이였다. 어둠 속을 장님처럼 손을 더듬어 위태롭게 조마조마하게 병원을 예약할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고리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필요한 책을 사서 읽었다. 몰랐던 암의 타입(호르몬 양성, 삼중 음성, 삼중 양성, 허투 양성 등)부터 다양한 항암제명(tc종류와 ac)과 뉴라스타(호중구 올리는 주사제)의 부작용, 그것이 심할 때 대처할 수 있는 조언과 경험담을 공유하며 함께 에베레스트보다 높다는 항암 산을 완주했다.


빛과 어둠, 동전의 앞뒤, 음지와 양지, 남과 여가 있듯 유이에도 양면성이 나타났다. 자라 보고 놀랬던 가슴은 트라우마가 꽂힌다. 비슷하게 생긴 솥뚜껑을 보고 지레 자지러지는 것이다. 기나 긴 투병생활 끝에 다다르기까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그때마다 터널안과 밖 같은, 인생무상을 느끼기도 한다.


전래동화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 등을 보면 대부분 권선징악이 많다. 고통이 심한 환자들은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무슨 죄를 지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에서는 흥부 보다는 놀부가 오래 건강하게 풍요롭게 산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다.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내가 주변의 유방암 환자들을 보면서 느낀 게 있다. 콩쥐 같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부당하게 주어진 일의 양이 많아도 혼자 삭이며 감수하거나 분담해야 할 가족 부양이나 가사 노동을 위태롭게 떠안고 있었다. No라고 말하거나 힘들다고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 말하지 못하는 착한 병이 있었다.


우는 아이 젖 주고,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법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하기 싫으면 의무감에 질 필요가 있다. 왜 책임과 의무를 지게처럼 짊어지고 정신을 갉아먹을까. 착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생긴 병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브라카나 환경오염이 원인일 수도 있다.


한번 세게 아팠던 사람은 새롭게 아픈 증상이 나타나면 불안하다. 혹시 재발일까. 전이일까. 몸이 아팠던 걸 기억하고 있어 수면을 방해하거나 의심병이 발동한다. 검사를 실시하고 이상 없다는 결과를 확인할 때까지 막연한 불안과 줄다리기를 한다. 그래서 표준치료를 마치면 유이에 접속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치료 효과가 좋은 경우는 예외이나 삶은 얄궂기도 하지 않던가. 치료 예후가 좋지 않은 예가 올라올 때면 그 부위가 아픈 증세가 생기기도 한다.


마음 또한 아프다.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 감정도 전염된다. 그것이 생과 사에서 사에 더 가까워지는 병마의 무서운 공격이면 같은 진단을 받은 이는 더 짙게 스밀 수밖에. 카페 특성상 아무래도 고통에 대한 조언이나 새로운 증상에 대한 문의가 많다. 아무래도 다급한 때 더 찾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후가 만족스러운 환우는 점점 카페와 소원해 지기도 한다.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자연스럽게 뜸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만사를 그릇되게 생각하는 흔한 질병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마치 병든 양처럼 서로를 감염시키기에 이런 혼란은 끝도 없이 퍼져나간다고 소아시아 오이노안다의 석벽 비문에서 발굴되었다. 정신 또는 혼의 힘으로 불안을 소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사람인지라 불쑥 끼어드는 증후나 증세, 혹은 주변환경이나 소식등으로 불안이 동거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긍정과 큰 호흡으로 총알을 장전할 필요가 있다. 총구를 적당한 선에서 들이대어 더 이상의 내면의 공격을 차단하자.


적당한 근거 없이 우릴 포획하는 불안을 내몰고 잠재된 고통을 일소하여 잔존하려는 고통마저 최소한으로 줄여보자.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혼동할까 염려되어 알린다. 나는 현재 아픈 곳이 없다. 그리고 과거 병력도 없다. 다만 이상하게도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고통을 이야기한다. 요즘 문득 의사가 아닌 나에게 아프다고 말하면 들어주는 것이 건강한 나의 과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아프면 의사에게 말해야지 왜 나에게 다들 아픈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의문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라. 가족들도 아프다는 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괴로워서, 그 아픔을 대신할 수 없어서 어쩌면 못 들은 척할 수가 있다. 아픈 이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서운할 수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어쩌면 소중한 가족이 오래 아파서 감정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이되기 때문에 차마 볼 수 없어 회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두통을 느낀다. 심할 때 ※※레놀을 복용하지 않으면 눈주위에 붉은 점들이 생기도록 토할 때도 있지만 아프다는 말은 자주 들어줄 수 있다. 불안은 끌어안고 토닥이면서 나아갈 수 있게 잠재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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